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0


중구 경동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오래된 자연취락도 있었다.

필자의 선친은 <인천지명고>(1993)에서 개항 전 '싸리재말'과 '바깟말'이 있었다고 쓰셨다.

지금의 애관극장 언저리 마을이 싸리재말이고 여기에서 조금 먼 곳이 바깟말이었던 것이다.


싸리재는 오늘날 경동·율목동·용동에 걸쳐 있는데, 중심은 아무래도 경동일 터이다.

인천인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싸리재는 지금의 경동사거리에서 애관극장 앞을 거쳐 용동마루터기를 지나 배다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싸리나무가 많아 한자말 축현(杻峴)으로 기록돼 조선시대 말기 옛 지도들에 실려 있다.

1900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 인천항에 내린 사람들이 왕도인 한성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육로로 갈 경우 말이나 노새를 타고 이 싸리재를 넘어갔다.


인천 다운타운의 다른 지역들에도 지명 변화가 여러 번 있었지만 경동은 매우 심했다.

개항 이전 선창리는 오늘의 신흥동·선화동·용동·내동·경동·전동·인현동·신생동·사동·항동·답동·해안동·송학동·선린동·관동·중앙동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1903년 8월 개항장 지구에 부내면을 신설할 때 거기 속하면서 화개동(花開洞)·신창동(新昌洞)·용동·내리·외리·답동으로 나뉘었다.

그 이유는 개항으로 이 지역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이 커져 분할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오늘날 경동 지역은 그 중 외리에 속했다.

그것을 잠시 외동으로 고쳤다가 1912년 5월 다시 분할했다.

이곳에 일본인 거류지역과 조선인 거류지역이 따로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명확한 구분이 필요해 조선인 거류지역은 다시 그냥 외리라 하고, 일본인 거류지인 내리(내동)의 일본인 거류지를 편입시켜 경정(京町)으로 명명했다.

일본어 발음은 '쿄마치'다.

왜 인천 거리에 서울 '경(京)'자를 넣어 지명을 붙이고 마을을 떼었다 붙였다 했을까.

경성으로 가는 길목이라 경성통(京城通)이라고도 불렀는데, 거기서 경정이라는 이름을 딴 걸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조선인 취락이 있던 이곳을 자기 지역으로 확보하고 싶어서 따로 떼어내고 붙이고 했던 것이다.


지명연구가인 경인교대 전종한 교수는 "경정의 신설과 관련한 일본인들의 지명적 실천(toponymic practices)은 내리와 외리라는 조선인 취락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통지명의 식민지적 해체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인천의 경동 지명은 1912년 경정과 쿄마치가 기원이므로 100년이 지난 셈이다.

일본인들은 쿄마치라는 지명을 좋아해서 오사카(大阪)·구마모토(熊本)·후쿠오카(福岡) 등 여러 곳에 같은 지명이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경성(서울)·대구·마산·개성·이리 등지의 일본인 거류지에 붙였다.

인천의 경정은 취락 지명을 인위적으로 떼었다 붙였다 해서 균형이 안 맞았던 모양이다.

1914년 근대적 토지측량을 끝내고 한반도 전체의 마을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때, 경정을 없애고 내동에 편입시켰으나 곧 다시 환원해 외리라 하고 1937년 또다시 경정으로 바꾸었다.

경동사거리 부근까지 일본인들이 거류지를 확대해 갔지만 싸리재는 여전히 조선인 지역이었다.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개항장 지구에서 뻗쳐온 인천의 상권이 내동을 거쳐 싸리재까지 이어졌고 고갯길 좌우에 작은 잡화상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싸리재는 신포동처럼 인천인들의 애환이 담긴 가장 인천다운 곳이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전국의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바꿀 때, 경정을 경동으로 하고 원래 내리였던 일부를 내동으로 편입시켰다.

그때 지명위원들이 이곳의 지명 근원이 외리임을 생각해 외동이라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정이라는 같은 지명을 가졌던 여러 도시 중 몇 곳이 인천의 경동처럼 일본식 지명 어원을 이어가지 않고 옛 지명을 회복했는지 분석해 보면 재미 있을 것이다.

최근 전국적으로 새로운 거리명이 만들어졌다.

유래를 깊이 살피지 않아 잘못된 지명 부여를 한 곳이 많고 인천에도 토박이들에게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지명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