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종착점 역사 속 도도히 흐르는 경항운하
   
 


세찬 물살·잦은 범람 … 통행불편 야기

연이은 개·보수로 정상운영 가능해져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2)

청강포를 건너 북상하게 되면 사·가운도 구간으로 접어든다.

이 구간 역시 일련의 호수 지역과 인접해 있어 치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구간은 황하와 연결돼 계속되는 토사의 침전 및 범람으로 인해 운하의 개·보수가 끊이지 않았다.

황하에 대한 견문록의 기록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황하가 범람할 경우 상당한 피해가 야기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원대의 오도릭부터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다.

명대의 리치는 황하가 규모나 중요성으로 중국의 두번째로 큰 대하라고 할 수 있다면서도 "황하는 조금도 중국의 법률과 질서를 존중하지 않았는데 마치 중국을 적대시하는 외족이 복수를 하는 것처럼 니사(泥沙)를 가득 싣고서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니 많은 영토가 황하의 피해를 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청 강희연간에 대운하를 이용했던 호른의 기록은 황하를 지나면서 운하의 물길은 느려지고 험난해졌으며 특히 수위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갑문이 많이 있다고 전한다.

또 호른은 그곳에서 수많은 수부(水夫)들이 선박을 밧줄에 묶어 갑문을 열고 닫는 과정에서 생기는 낙차를 이용해 선박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보다 앞서 최부 역시 이 운하를 통과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강의 흐름이 꼬불꼬불하다가 이곳에 와서야 언덕이 탁 트여서 세차게 흐르는데, 세찬 기세는 바람을 뿜고 소리는 우레와도 같아, 지나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전율하며 간혹 배가 뒤집힐까 걱정했다. 동쪽 기슭에는 돌제방을 쌓았는데 서로 어긋나게 파내어 물살을 터놓았다. 아무리 작은 거룻배라 하더라도 대나무로 꼰 뱃줄로 끌어야 하는데, 소 열 마리의 힘이 있어야만 가능해 보였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당시 사·가운하 구간이 수위 차이가 심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갑문을 설치, 운영했고 선박의 운행에는 어려움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 건륭년간의 메카트니 역시 이 구간에는 운하와 소택지를 구분하는 제방이 매우 두텁게 건설됐음을 밝히고 사실상 이 구간을 제대로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제녕을 지나면 회통하에 들어선다. 회통하는 원 지원 26년(1289년) 안민산에서 임청까지의 약 160㎞를 이으면서 처음 개통됐다.

당시 운하의 물을 끌어 와 31개의 갑문을 설치해 수량을 조절했으며 황제가 직접 '회통하'라는 이름을 하사했던 것처럼 이를 통해 항저우와 베이징이 직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원대에는 토목기술의 부족으로 이용빈도가 높지 않았으나 명초 1411년 제녕과 임청 사이에 15개의 갑문을 배치해 성공적으로 수위를 조절할 수 있다.

메카트니는 회통하의 폭이 15~20m로 넓지만 진흙투성이라고 지적하고 "마치 강물이 굽이치는데 황하가 운하의 흐름을 예술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제방은 대단히 불규칙했는데 어느 지역은 매우 높았지만 어느 지역은 평지와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회통하를 지나면 톈진까지 연결된 영제거로 접어든다.

영제거는 수나라 양제 때인 608년에 허베이지구 군사운수의 수로로 최초로 개통된 운하다. 송대부터는 어하라고 불렸다. 통제거(通濟渠) 등과 함께 남북교통의 주요 수로가 됐으나 금·원 때 대운하의 물길이 바뀌어져 동류하면서부터 황폐해졌다.
 

   
 


메카트니는 이 구간의 운하가 꾸불꾸불하다면서도 어떤 지역은 하상이 본래보다 6m 이상 높아진 곳이 있음에도 우기에는 범람으로 인해 운하의 변동이 심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영제거를 왕래하는 선박은 여전히 많았으며 원대의 마르코 폴로는 "이곳을 통해 위 또는 아래로 향로나 다른 진귀한 물건 등 엄청나게 많은 상품들이 운반된다"고 표현했다.

톈진에는 대운하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선박이 만나는 또 다른 병목구간을 형성하며 통혜하를 통해 베이징으로 연결된다.

통혜하는 원대 1293년 곽수경이 계획해 완성한 운하로 통상 통주의 장가만과 베이징성 입구의 대통교를 연결하는 30㎞ 가량을 말한다.

통주의 백하와 합류한 통혜하는 톈진까지 연결하는 96㎞를 통혜하라고도 부르지만 명대 이래의 통혜하는 통주-대통교 구간을 지칭한다.

따라서 명말 마테로 리치의 기록에 따르면 통혜하에는 혼잡을 피하기 위해 조정에 필요한 화선만 운행하도록 허가했으며 다른 모든 상품은 마차나 말, 혹은 운부를 통해 성내로 진입했다.

이는 통혜하가 남방 지역의 운하와 달리 폭이 좁고 수원 마련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메카트니 일행은 톈진까지 도달한 뒤 통혜하의 수심이 얕아서 더 작은 규모의 선박으로 화물을 옮겨 실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선저가 바닥에 닿아서 줄로 끌어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중국 관리는 메카트니에게 통혜하의 수심이 얕아 진행이 느리니 아예 사절단 인원은 제방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경치를 관람하라고 조언해 줄 정도했다.



▲대운하 유지를 위한 각종 수리시설 설치

이처럼 6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대운하에는 운하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설치했던 각종 수리시설이 포함돼 있었다. 시설물은 인공운하의 수량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지 않도록 유지함으로써 조운선을 비롯한 선박이 원활하게 베이징을 왕래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대운하 시설에 대해 최부는 "물이 쏳아지면 방죽을 설치해 막고, 토사가 쌓이면 제방을 쌓아서 대용했으며 물이 얕으면 갑문을 설치해 물을 모았으며 물살이 급하면 홍(洪)을 설치해 급류를 늦췄으며 물이 모이면 취(聚)를 설치해 분산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 하류의 강약, 수위의 고저에 따라 파, 제방, 갑, 홍, 취 등이 각각 다른 용도로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최부에 따르면 파란 선박을 대나무줄로 묶어 서로 수위가 다른 곳으로 끌어 올리거나 내리는 시설로 선박을 동여 맨 대나무줄을 나무기둥에 묶어서 돌려 선박을 끌었다. 갑은 수량과 수위를 조절하는 판자를 설치해 선박을 통과시키는 것을 말한다.

1782㎞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수로의 수심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선박을 견인하는데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명말 어느 수학가의 언급을 인용한 마테로 리치의 기록에 따르면 운하유지와 관련한 하공 비용은 모두 국가가 담당했으며 매년 백만량이 소요된다고 했다.

중국의 여러 자료에서도 청대 제방 공사나 운하 준설과 같은 하공비용으로 한 건당 수십만량에서 수백만량에 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기록됐다.

실제로 국가권력은 대운하에 대해 하공을 지역사회의 총체적인 수리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처리했고 그 결과 대운하가 중요했던 회양지역의 농업생산력은 점차 저하될 정도였다.

"국가가 황하 치수에 비용을 아끼지 않고 운하 치수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 것은 조량 운송 때문"이라는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은 대운하에 대한 국가권력의 관심이 얼마나 심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3편에서 계속>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