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조앤 K. 롤링


솔직히 지난 보름 동안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나는 보름 동안의 휴가를 얻었는데 내 철칙 중에 하나가 휴일에는 결코 일하지 않는 것이다. 즉 휴가도 휴일에 속하고 책을 읽고 기사를 쓰는 것도 일이니 머리 지끈한 독서를 하지 않았다.

나는 필리핀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다시 읽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마닐라에 도착해 보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물들이 거리 곳곳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빨간 코트를 입은 산타와 사슴이 끄는 눈썰매라니.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땐 새벽 3시였고 아마 나는 오랫동안 뒤척이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내가 깨우는 바람에 피곤한 몸을 일으키고 샤워를 하고 이를 닦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여독이 가시지 않아 몽롱한 상태에서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뽈락'이라는 도시에 있는 '부에노라'는 산간벽지 동네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필리핀 토종소인 까라바우가 끄는 달구지에 몸을 실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도 많았으므로 까라바우는 꽤 힘에 겨워했다.

이 여행의 백미는 까라바우 달구지를 탄 채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우기 때가 아니라 다행히 강의 수심은 어른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강폭은 100여m쯤 될 정도로 넓었다.

그 유명한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할 때 쏟아낸 잿빛 화산재가 개흙을 이룬 강은 무척이나 질척였다.

개흙은 고향 인천의 개펄 같았다. 나는 덜거덕거리는 달구지에 간신히 몸을 실은 채 잿빛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무심했고 까라바우는 달구지를 끌면서 똥과 오줌을 쌌고 달구지 맨 앞자리, 그러니까 까라바우 궁둥이 바로 뒤에 앉았던 나는 똥과 오줌 세례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기다란 소꼬리가 채찍처럼 내 머리를 휘갈겼다.

소꼬리로 이마를 맞은 기분이란…, 한마디로 독특했다. 약간 아프기도 했지만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이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밀림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숲속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미리 준비해 간 밥 120분과 고기반찬 120분을 그곳 원주민들과 나눠먹었고 마을 아이들에게 과자와 사탕 음료수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눠주었다.

밀림 속 마을에 화장실이란 게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코브라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풀숲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까라바우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숲길을 통과하고 강을 건너고 왔던 것을 되돌아왔다.

돌아올 때도 인간들이 못마땅했던지 까라바우는 똥오줌을 퍼부어댔고 꼬리로 내 뺨을 몇 대 휘갈겼다.

'철썩' 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내가 맞이한 크리스마스 중에 가장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다.


또한 어떤 환상, 판타지 세계에 잠시 빠져들었단 느낌이다. 이국의 땅에서 달구지를 타고 강을 건너고 밀림을 뚫고 가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에 다녀왔던 느낌 때문이었는지 나는 필리핀에서 남은 휴가를 보내며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 중 '비밀의 방' 편을 다시 읽었다.

또 호텔 방 침대에 누워 TV를 통해 판타지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보았다. 아이들과 극장에 가서 판타지 블록버스터 〈호빗〉을 보려는 시도를 했다. 마치 판타지에 푹 빠져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대선이 끝나고 '맨붕'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 역시 '맨붕'이다.

이럴 땐 판타지에 빠져 현실을 잊는 것도 좋은 치유방법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던지 아니면 영화 <반지의 제왕>의 동명 원작 소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중국 판타지 소설 <서유기>를 읽는 것도 맨붕을 치유하는데 제격이다. 추천할만한 판타지 소설이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번 여행에서 우리의 삶은 각박하고 현실은 냉혹한데 어찌 생각해보면 현실은 곧 판타지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꿈을 포기할 일도 좌절할 일도 없는 것이다.

현실은 항상 꿈과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