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니 아까 생활총화를 하면서 비판당한 정신적 고통과 순식간에 돌변한 이웃들에 대한 배신감이 자신도 모르게 풀리면서 막내딸 인화 생각이 났다. 맏아들의 조국배신행위로 인해 낮에 새별고등중학교 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여 사상투쟁까지 벌였다는데 그때 막내딸 인화가 당한 정신적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자신이 생활총화 장소에서 믿고 있던 이웃들로부터 호상비판을 당하고 보니 비로소 그 실상이 감지되는 것이었다.
정남숙은 생활총화를 하면서 가혹하게 비판 한번 당한 것이 서러워서 엉엉 울고 있는 자신이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도 유약해 보여 애써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전 세대주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는 수많은 난관과 고통이 자기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나이 50이 가까워 오는 에미나이가 찔찔 눈물이나 짜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라면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온 삶을 하늘에 감사하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바람이 빠진 고무풍선처럼 외부로부터 가혹한 압력이 밀려와도 자기 스스로가 그 압력을 흡수하며 자식을 낳아 키운 어버이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로부터 배신자의 여동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상투쟁의 희생양이 된 막내딸 인화의 낮 정황을 유추해 보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까 밥곽이 든 손가방을 던져놓고 집을 나올 때 일어나 인사도 못하고 쓰러져 있었을까?
곰곰 되짚어 생각해보니 자기 설움에 겨워 구공탄 더미 뒤에 숨어 눈물이나 짜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울었던 흔적을 감추며 자신의 아파트가 있는 쪽으로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파트 통로 저만치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 같더니 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마니야요?』
『기래. 밤이 야심한대 와 거기 나와 있네?』
정남숙은 큰딸 인숙에게로 다가가며 손을 잡았다. 인숙은 추운 듯 어머니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심중의 근심을 털어놓았다.
『아까, 친구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간 인영이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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