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완상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제 나는 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전혀 달라져 있지 않은 걸 확인하게 된다.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은 여전히 기생충처럼 살고 있고 탐욕한 자들은 여전히 탐욕의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다.

기회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잇속을 따지며 몸 붙일 곳을 찾고 있다. 이런 자들이 내 일상에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인생은 비극이로구나' 하는 짧지만 아린 비명을 질렀다.

4년 전이었던가? 그때 겨울은 몹시 춥고 주린 계절이었다. 그리고 춥고 주린 계절은 내 어깨를 여전히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짓누르고 있다.

역사란 반복되는 것인가라는 우문에 억지로 꿰맞출 필요까진 없겠지만 적어도 내 일상은 지리멸렬하게 반복되고 있어 나는 또 한 번 좌절하고 만다. 정녕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억압의 굴레를 그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시지프스처럼 굴려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역사 속에는 억압의 운명을 거부하고 진실을 얘기하고 거짓과 위선, 억압을 전복시키려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항상 존재했다. 〈바보예수〉(한완상·삼인)는 예수의 바보 같은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예수는 정말 바보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예수가 제자 베드로의 장모 집에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사람들이 예수에게 모여들자 베드로는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며 그곳에서 군중의 왕으로 군림하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때, 예수는 또 다른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방랑길을 떠났다.

권력이 눈앞에 있는데도 이를 버리고 기층민의 삶으로 뛰어 들어가는 예수의 삶의 행적은 바로 바보의 삶 그 자체였다.

예수는 바보의 삶을 살다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아 조롱과 고문을 당하며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다.

권력과 타협하고 스스로 권력을 틀어 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핍박의 삶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처절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를 비우고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면서 핍박의 삶을 인간 평등의 삶으로 승화시킨다.

지금 나는 핍박을 받고 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1%에 속하지 않는 99%가 핍박과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음해하고 박해하거나 타인의 것을 빼앗아오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핍박을 대면하면서 자라왔지만 진정으로 핍박을 이겨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핍박을 받으며 이에는 이 눈에 눈 격의 복수를 다짐했기 때문에 나는 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 하지 마라"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나는 내 권리를 침해하고 나를 억압의 굴레로 묶어놓는 자들을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저자 한완상은 진정한 예수 따르미가 되려면 예수의 바보스러움을 주목하라고 한다. 그는 예수의 말씀 중 바보 같은 메시지에 주목했고 또 바보스러운 선택을 연속해온 그 삶과 죽음, 부활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한완상은 예수 당시 로마제국의 승리주의, 즉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던 시저의 욕망과 그러한 승리주의에 가담할 유혹을 느끼면서도 이내 이를 떨쳐내 '우아한 패배'의 길에 다다른 예수의 모습에 주목한다. '바보 예수'를 본받아 첫째가 꼴찌 되고 원수와 아름답게 하나 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그때, 한반도에도 전 세계에도 고통과 분단, 전쟁을 극복하고 피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나는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본다. 4년 전에도 이 핍박은 있었고 그것은 집요한 현재진행형이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그것이 이뤄질 때까지 오래 참을 수 있다"는 말이 귓전에 울린다. 그런데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떠넘겨본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