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지금 나는 입김을 불어 곱은 손을 녹이며 글을 쓰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방 천장은 흥건히 젖어있다. 내 체온을 품고 있는 날숨이 얼음장이 된 콘크리트 천장에 부딪혀 물방물로 맺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덧붙여 좋은 그림을 보면서도 평화로워진다. 그런데 요즘 나는 제대로 읽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이다. 며칠 전 이런 심경을 토로하니 한 스님이 '마음엔 본래 평화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짧은 글을 보내왔다. 맞는 말 같지만 사려 깊지 못한 나로서는 도무지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내 처지를 말한들 그것은 앓는 시늉에 불과하다. 고독 속에서 방황하던 재일 한국인 서경식이라는 청년에 비하면 말이다. 서경식의 형들은 서승과 서준식이다. 이들은 1971년 이른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과 17년의 옥살이를 한다. 당시에는 독재자 박정희가 철권통치를 휘두르고 있을 때다.

형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있는 동안 서경식은 와세다 대학 3학년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 형들처럼 일본 사회를 떠나 모국인 한국으로 건너와 진실한 삶을 살아보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형들이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히면서 서경식이라는 재일 한국인 청년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리고 그는 공포와 고독에 질식한 채 절망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고독과 절망의 세계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그는 유럽과 일본으로 미술 순례를 떠나면서 힘겨운 시절을 견대 낸다. 그의 미술 순례를 담은 책이 바로 〈청춘의 사신〉(창작과비평사)이다.

<청춘의 사신>은 출간된지 10년이 훌쩍 지난 묵은 책이다. 그런데 나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득의만면한 웃음을 짓고 있는 독재자의 딸의 얼굴이 박힌 포스터가 어느 가난한 노동자가 첫차를 기다리며 기대고 있었을 담벼락에 붙어 있고, 붉은색 플래카드들이 실업자의 허탈한 시선이 머물렀을 푸른 허공에 나부끼고 있는 2012년 12월 어느 겨울밤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저자 서경식은 이 책에서 야만과 대량살육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어두운 그림자와 악몽을 죽음의 흔적들을 그림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20세기의 어두운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들과 마주대하며 악몽을 떠올리기도 하며 그 악몽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서경식은 뭉크와 피카소, 조르주 루오,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에곤 실레, 모딜리아니, 디에고 리베라,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등 20세기의 광기와 죽음, 악몽을 그려낸 작가 29명의 그림을 소개한다. 이 책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이 책은 미술작품을 통한 20세기의 광기에 대한 철저한 사색이다.

저자는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드 뭉크의 '생명의 춤'에서 인간의 욕망과 추악함, 실의와 체념을 발견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적대하는 힘'에서는 파국에 대한 불안이 깃든 시대를 읽어낸다. 클림트의 이 그림에는 원숭이 형상을 한 괴물이 화면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그 원숭이는 인간세계의 사악한 사건에 탁한 눈빛을 던지고 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베를린의 거리 풍경'에서는 소외감과 자포자기 심정의 위태로운 존재감을 찾아낸다.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는 해골 모양의 사신(죽음의 신)이 소녀를 잡아가는 기괴한 형상을 담고 있는데 저자는 20세기의 욕망과 좌절을 발견해낸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괴기, 광기, 죽음,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 예를 들자면 나치를 찬양한 독일 화가 아돌프 지글러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한 후지타 츠구하루의 선전화들이 그렇다. 결국 저자는 20세기의 죽음의 그림자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나는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20세기의 망령들의 차가운 그림자를 아직 느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덮는 순간 엄습하는 절망을 느낀다. 이제 그 망령을 떨쳐내야할 때이다.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