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본다. 여태껏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 뒤죽박죽이다. 도대체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살았지?

초등학교 때 인생의 목표는 번데기 장수였다. 학교 교문 앞에서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가 참 멋져 보였다.

번데기 리어카에는 손으로 뺑뺑이를 돌리는 원형 뽑기판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표창 비슷한 다트를 던져 뽑기판에 적혀 있는 상품의 영역에 들어가면 그 상품을 얻을 수 있었다.

대개 '꽝'이 나왔지만 번데기 100원어치부터 공책, 연필 한 다스, 극장표까지 다양한 상품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꽝'이 나온다고 해서 소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번데기 10원어치를 먹을 수 있었다.

사행심을 부추기는 도박 같지만 그것은 번데기 장수 아저씨가 번데기를 팔기 위한 장사 수완이었다. 어쨌든 번데기 리어카 주변은 아이들로 북적거려 놀이터와 같았다. 그래서 난 번데기 장수 아저씨를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번데기 장수가 되지 못했다. 소질이 없는 공부를 해야 했고 늘 누군가와 비교되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밥이라도 빌어먹고 살려면 이공계에 가라는 부친의 권유에 의해서 이과계열을 선택해야 했다.

내 꿈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좌절되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몸에 맞지도 않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지난 토요일 나는 멀리 남쪽 산골짜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 술 한 잔을 올렸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진 지나치게 검소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처럼.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자주 잡쉈다.

집안 어른들은 내가 아버질 꼭 닮았다고 하는데 난 성실하지도 않으며 술도 많이 먹지 못하는 편이다.

아버진 나를 둔재 취급을 했는데… 난 내 인생에서 그것이 늘 상처였다.

인간은 나름대로 비범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난 그 상처로 인해 내 비범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다.

아버지가 내게 잘해준 건 책 을 좋아하던 내게 책을 많이 가져다준 것 그리고 내가 결혼하려고 할 때 반대를 안 한 것이다. 난 그 점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난 무심한 인간이라 아버지를 잊고 산다.

'후원의 밤' 주점에 시인 신현수 형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 아버지의 제자이다. 아버지가 부평중학교에서 문예반 지도교사로 있을 때 신현수 형이 문예반 학생이었다.

어느 날 겨울이었던가 가을 밤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내가 여섯 살 때 신현수 형과 문예반 학생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당시 우리 집은 단칸방살이였다.

부평중학교 <거북선>이라는 교지를 만드는데 교정을 보러 우리 집에 온 것이다.

나는 그때 신현수 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체구가 작았고 검정 교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모나미볼펜이 꽂혀 있던 모습을.
이제 이 글의 목적인 책을 소개해야 할 때이다.

주저리주저리 과거사를 떠든 것 같아 죄송하다.

그런데 내가 옛일을 떠올리는 이유는 신현수 형이 40여 년 동안 쓴 시를 한권에 모은 <나는 좌파가 아니다>(작은숲)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나는 신현수 형을 만날 때마다 39년 전 우리 집 단칸방의 모습이 꼭 떠오르곤 한다.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앉은뱅이책상에 둘러앉아 원고와 교정지를 정리하던 아버지와 중학생 형들과 동태찌개인가 김치찌개인가를 끓이고 밥그릇에 고봉밥을 담아 저녁상을 차려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말이다.

시집 <나는 좌파가 아니다>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기에는 시인 신현수 형의 40년 인생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 시집에는 해직교사 시절의 참담함과 소시민으로서의 부채감, 시민운동가로서의 책임감이 두루두루 녹아있는 시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우리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 옆에 다가서기도 하며 결국 그들 주변에 서성거리기도 한다.

그 경계지점에서 그는 늘 쭈뼛거리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형의 시가 진솔하게 느껴진다. 다음번에 신현수 형을 만나면 그 당시 우리 어머니가 저녁끼니로 내놓았던 찌개가 동태찌개인지 김치찌개인지 물어봐야겠다. 갑자기 그게 궁금하다. 혹시 우리 어머니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으려나?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