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특별인터뷰/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 정약용의 삶과 꿈


국민 의식개혁·도덕성 회복·기술개발, 다산실학 핵심 

사후 100년동안 잊혀져 … '망국시절' 조선학 중심 부활 

올해 탄생 250주년, 새시대 맞게 현실정치에 반영해야



다산 정약용(1762~1836), 그는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성리학을 버리고 백성의 윤택한 삶과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제3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이 실학이었다.

그는 실학의 두 갈래인 경세치용(중농학파)과 이용후생(중상학파)을 집대성한 실학자였다. 1822년(순조22) 회갑을 맞은 그는 평생의 저술 작업을 마감하고, 그동안 써온 503권 182책을 '여유당전서'로 정리했다.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그의 대표작이다. 남양주 마현 고향집 건너편,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두물머리는 교통의 중심이며 소통의 장소였다.
 

   
▲ 여유당현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그곳은 강줄기를 따라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 팔도의 뭇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조선의 백성을 보았다. 그는 사상뿐만 아니라 시와 글, 글씨와 그림 등 예술적 감성도 뛰어난 통합적 인문주의자요, 실학자였다.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아 다시 다산이라는 브랜드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40여년을 다산 연구에 매진해 온 박석무(70)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2층 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산의 삶과 꿈을 들어본다.



-다산은 누구인가.
"다산은 학자다. 생각의 범위도 한없이 넓고 그릇이 크다. 관심분야가 너무 많다.

그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각 분야별로 백과전서적 학문을 연구했으며, 그 당시나 지금도 전문가 못지않은 높은 수준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냈다.

다산은 왜 그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탁월한 업적을 남겼느냐?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에 따르면 다산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민(民)과 국(國), 즉 백성과 나라였다. 어떻게 하면 백성에게 실리와 실익을 줄 수 있느냐. 즉 실제로 이익이 되고 실제로 보탬이 되느냐, 어떻게 해야만 부국강병이 되느냐를 고민했다. 민과 국, 그 두가지만 생각했다.

백성에게 도움과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전부 연구했다. 또 국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나라에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고 부국강병을 이루느냐였다. 그는 어떻게 백성들이 고르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그에게는 애국·애족·애민의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과 소망은.
"오직 그의 꿈과 소망은 백성들이 고루 편안하게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배부른 나라였다. 즉 그가 원하는 나라는 요순시대,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라면 선진국가요, 일류국가였다. 그것이 그의 꿈이요, 열망이었으며, 그 방법을 모색한 것이 그의 500권이 넘는 저서이며, 다산학이다.

그럼 다산의 꿈과 열망이 오늘날 이룩됐느냐? 완전한 부국강병을 이뤘느냐?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그렇지 못하다. 그러기에 오늘날 다산의 소망이, 꿈과 열망이 우리의 꿈과 열망이 되고 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다산을 찾는 이유다.

특히 다산이 요순국가를 만들기 위해 제시한 대안들이 오늘이나 그때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다시 다산을 찾게 되고 연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다산은 학자고 실학 사상가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천하고 행동하는 학자였다.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향상 변화시키고 개혁을 추구했다. 모두 개혁마인드다. 바꾸고 고치지 않으면 나라는 발전할 수 없고 국민은 편안하게 잘 살 수 없다. 그러기에 개혁이 필요했다.

정권 초기에 정치·경제를 개혁하겠다고 하는데 말로만 개혁이지 안되고 있잖느냐. 그러기에 다시 다산을 찾을 수밖에 없다."

 

   
▲ 초당현판


-다산 실학의 특징은.
"다산은 교육의 문제를 우선 지적한다. 그래서 교과서 문제부터 짚어본다. 다산이 살았던 시대의 교과서는 공자와 맹자가 만들어 낸 유교경전이다. 그런데 이 경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송나라 때 주자가 해석한 성리학적 논리가 가미된 유교경전을 배웠다.

여기서 다산은 성리학으로 해석한 유교경전이 행동과 실천을 떠난 논리로 변모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성리학적 해석을 지우고 다시 고경(古經)으로 돌아가 새로운 논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고경을 실사구시적으로, 실학적으로, 실천가능한 논리로 해석하자고 했다.

그는 우선, 실용주의적 논리로 해석한 경전을 가지고 국민을 교육시켜야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보았다. 성리학적 논리를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인 행동가능한 논리로 바꿔서 국민을 교육시킬 수 있느냐가 첫 번째 문제였다.

그래서 다산은 250권의 경전 주석서를 다시 만들었다. 이것을 위당 정인보는 '민중적 경학'이라고 해석했다. 소수 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 실익을 줄 수 있는 논리로 경을 다시 풀어썼다. 그래서 그것을 민중적 경학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정치다. 사실상 공무원인 공직자가 정치를 한다. 일반 백성이 정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공직자가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도덕성의 중심은 청렴이다. 공직자가 청렴할 때 나라가 된다. '목민심서'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그런 논리다.

공직자가 청렴을 회복할 때, 청렴한 행정을 할 때만 일류국가, 선진국가가 된다는 것인데, 오늘날 딱 들어맞는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은 공직자들의 부정비리를 척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뇌물이 판치고 많은 공직자들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마지막 세 번째로 다산이 설계한 인류국가의 미래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기술개발에서 찾았다. 기술개발 없이 국부증진은 불가능하며, 국부증진 없이는 절대 일류국가로 갈수 없다. 아무리 도덕적인 국가가 되고 아무리 민중적인 경학의식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잘먹고 잘살 수 있어야하는데, 결국 기술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다산은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을 담은 '경세유표'를 통해 정부기구의 개편을 요구하고, '이용감(理用監)'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청나라에서 기술을 도입하고 국내에서 기술개발을 담당하도록 요구했다.

결국 다산은 첫째, 새로운 경학을 바탕으로 국민 의식개혁을 추구했으며, 둘째, 국민의 도덕성 회복, 그것은 바로 공직자가 청렴해야 한다. 세 번째, 기술개발을 통한 국부증진이다. 부국강병이 되지 않고는 일류국가로 갈 수 없다. 언제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거나 국민이 가난해서 굶어 죽어버린다면 끝나버린다.

그래서 기술을 개발해서 국가의 부를 축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다산 개혁사상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 온갖 대안을 제시한 것이 다산 저서이고, 바로 다산학이다."


-다산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기본적으로 공자와 맹자의 유교철학이다. 또 하나는 조선 후기의 실학적 논리를 편 선배 학자들이다. 그 가운데 두 명이 '반계수록'의 유형원(1622~1673)과 '성호사설'의 이익(1681~1763)이다.

특히 성호 이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술개발 이론같은 경우는 북학파인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북학의'의 초정 박제가(1750~1805), '주해수용'의 담헌 홍대용(1731~1783) 등의 영향을 받았다.

즉 자신의 직계학통인 반계나 성호는 물론이거니와 당색을 달리하는 학자들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체계를 집대성했다. 기본논리는 고경이었다.

특히 젊어서부터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서양의 과학사상을 접하면서 다산은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그의 열린 사고가 다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할 수 있었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왜 다시 다산인가.
"다산은 생전에는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지만 실제 정치에는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또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나라를 빼앗겼다.

때문에 다산의 실학사상이라든가 실용주의 논리가 현실정치에 적용될 기회가 없었다. 그의 저서도 몇 사람의 학자들만 읽어보았지 간행이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기회도 없었다. 1836년 다산이 돌아간 지 100년이 지난 1938년에야 다산 저서 여유당전서가 간행되면서 다산의 논리가 학자들 사이에서 거론됐다. 특히 망국의 시절, 민족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조선학의 논리가 나올 때 그 핵심 인물이 다산이었다.

해방 이후 많은 후학들이 나오면서 그의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논리를 취사선택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데 적용하자는 논리를 전개한다.

특히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서 그 정점에 왔다. 다산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활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즉, 지역감정을 타파하자,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자, 신분차별 없애자, 빈부격차를 해소하자. 그러려면 부자에게는 세금을 많이 물리고 가난한 사람을 국가와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損富益貧·손부익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보편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으며 조금씩 현실정치에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다."


-다산 실학과 성리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리학은 관념론이다. 모든 세상 사물의 원리를 이(理)로 보고 여기에 모든 것을 가둔다.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유교의 중심논리를 성리학에서는 이로 본다. 그러다보니 행동이 없고 실천도 없다. 다산은 인(仁)도 이치개념이 아닌 행위의 개념으로 본다.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둘이다. 글자 그대로 두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는 것이라고 봤다. 이 처럼 다산의 이(理)와 성리학의 이(理)는 차이가 있다.

또 주자(朱子)는 덕이라는 것을 이치로 본다. 하지만 다산은 덕, 그 자체가 이가 아니고 덕이라는 타고난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길 때 덕이라는 개념이 확실해 진다는 논리다.

이에 다산은 덕을 이치로만 본다면 "그것이 손에 잡히느냐 눈에 보이느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다산의 저서만 250권이다. 이는 관념속에 갇혀 있던 모호한 개념들을 행위와 실천의 개념으로 바꿔준 것이다."


-정약용과 유형원, 이익의 공통점과 다른점은.
"시대의 차이가 있다. 반계는 성리학만 가지고는 안 된다며 고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지만 주자학의 논리를 샅샅이 비판하지는 않았다.

성호 이익도 성리학적 논리만 가지고는 안 된다면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완전 무결하게 주자의 이론에 반대하지는 못했다.

다산 때에 오면 성리학적 폐단이 들어난다. 이에 다산은 문제점을 정면으로 낱낱이 지적하면서 새로운 고경의 논리를 만들어 낸다. 이른바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반계와 성호는 토지제도라든가 경제 정책에서 일맥상통한 점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다산에 와서야 완전히 '국유냐' '공유냐'라는 문제가 나온다. 농사짓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논리를 편다.

특히 다산에 이르러서야 민중 주체적 논리가 나오고 정치적으로 민족 사고가 강화된다. 반계나 성호가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적 논리와 열린 생각을 하게 된다. 정권은 선거를 통해서 나오며, 정치가 잘못되면 통치자는 언제라도 국민의 뜻에 의해서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호나 반계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산의 실학사상이 더 심화된다.

역사학자 정인보는 다산의 학문을 '민중적 경학'이라고 했다. 일반 백성들이 몸소 실천이 가능한 이론과 학문, 경전해석에 힘썼다는 것이다. 관념보다는 실재를 중시하고 제도개혁과 기술개발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하겠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배교(背敎) 논란과 관련,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이) 20대에 천주교에 관여했지만 제사 문제와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천주교와 선을 그었다"며 "천주교 신자였다면 그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에 빠진다"고 밝혔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