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2008년 4월 1종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된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최용신기념관 전경. /사진제공=최용신기념관

계몽운동가 '상록수' 최용신

개혁·개방 꿈꾼 민회빈 강씨

왕 굴복시킨 '아랑' 도미부인

애틋한 사랑의 전설 염경애

슬픈 역사 '희생양' 의순공주 등

시대 뛰어넘는 여성상 보여줘


▲안산, 최용신="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한 것이다."
나, 최용신은 국권상실기 암울한 시대에 26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어. 대학을 중퇴하고 화려하고 안락한 도회지가 아닌 벽촌 농촌현장을 선택한 거지, 그곳이 안산 본오동(당시 수원군 반월면 천곡) 샘골(천곡)강습소야. 지금 제가 묻힌 곳이지.

민족혼을 일깨우는 농촌계몽운동과 교육사업을 펼치는데 일생을 바쳤어.
특히 1931년 10월 샘골에 들어와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 짧은 3년이 가장 강렬하고 빛난 삶의 순간이었지.
 

   
▲ 영회원


1930년대는 전체 인구의 80%가 빈곤한 농민이었어. '농촌이 일어나야 조선이 일어난다'는 생각으로 YWCA 농촌지도사로 샘골에 왔던 거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직접 교재를 만들어 아이들은 물론 부녀자와 노인들에게 한글·산술·수예·성서 등 신교육을 밤낮으로 가르친 거야.

오늘날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때 그 샘골강습소 자리를 지켜냈고 '상록수' 정신을 이어간 제자들과 제2, 제3의 최용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맙지.

소설(심훈)과 영화(신상옥 감독, 임권택 감독)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인 저를 모델로 삼아 계몽운동가의 저항의식을 형상화한 거지.

다만 나는 제자들에게는 사랑을, 마을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심어주었을 뿐인데, '지금은 식민지 상태이나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작품 속에서 '썩어지는 한알의 밀알'로 비유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거야.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에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은 유달영 박사가 '농촌계몽의 선구여성 최용신 소전(1939년)' 등 전기물 3종을 출간하면서부터야.

사랑하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병마까지는 이기지 못해 일찍 떠났어. 그러나 샘골을 통해 인생의 좌표가 바뀐 제자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켜켜이 쌓인 '최용신기념관'을 중심으로 그 정신이 이어져 흐뭇해.
21세기 '인간 상록수'의 뜻과 정신은 다문화가정에 있지. 그들의 국내 적응을 돕고 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거야.

■ 최용신(1909~1935)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나 원산 루씨여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를 중퇴한 후 농촌계몽활동을 했다.


 

   
▲ 최용신기념관에 전시된 조각 작품'안김'

▲광명, 민회빈 강씨=나, 민회빈은 결코 시아버지 수라상에 독을 넣지 않았소.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청나라에 끌려간 지 8년 만에 귀환한 이후 나의 삶은 뒤틀렸소. 인조의 뒤를 이어 대권을 이어갈 남편 소현세자는 의문의 '학질'로 죽었고, 나 역시 남편을 보낸 지 1년도 안 돼 시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받았던 것 아니겠소. 처음에는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여자가 정치에 관여했다는 이유였소. 세자빈은 참혹한 형벌이었지 결코 파랑새가 아니였소.

심양에 머무는 동안 경영수완을 발휘, 국제무역과 농사일로 많은 재산을 모아 끌려간 백성을 구제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온 몸으로 실천했는데….

나와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있으면서 명나라의 멸망을 현장에서 목도했소. 그리고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천주교와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을 접하고,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꿈꾸었던 것이 그리 큰 죄가 될 줄을 누가 알았소.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됐던 조선 사회에서 나의 행동과 꿈은 부덕(不德)의 표상이었고, 마녀사냥의 대상이었소.

그러기에 실록은 나를 음란하고 불손하다고 기록하지만, 그것은 조선의 남성적 시각일 뿐이오. 관점을 바꿔보면 시대를 앞선 오늘날 여성 지도자의 표본이 아니겠소.

죽은 지 80여년 만에 겨우 명예는 회복했지만 나는 아직도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소. 경기도지사님! 언제 저희 집, 광명 영회원(永懷園)에 한번 오시오.


■ 민회빈 강씨(?~1646)는 조선 후기 소현세자의 빈(嬪). 본관은 금천(衿川). 우의정 석기(碩期)의 딸이다. 그가 묻힌 영회원은 진입로조차 없는 비공개지역이다.



▲하남, 도미부인="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된 천한 백성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고왔으며 또한 절개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삼국사기 권 제48 열전 제8)
나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 현존 최고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부인이야.

남편 도미와 함께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았지. 그러던 내가 왕과 대결한 열녀의 전형적인 인물이 된 기막힌 사연이 있어. 조선의 삼강행실도에는 열녀 15명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나야. 우리나라 최초의 열녀인 셈이지.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나와 설씨녀·백결·향덕 등 11명은 유교적인 윤리관-충忠·효孝·의義·신信·간諫-을 내세운 각각의 성실한 행위를 다한 표본으로서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야.

도미설화의 이야기 구조는 권력과 신분적 특권을 이용한 제왕의 폭력과 유혹에도 끝까지 지혜와 신념을 발휘해 정조를 지키고천성도(泉城島)에서 남편을 다시 만난다는 것이지.

개루왕(128~166)이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절을 지키는 것이 먼저지만 만약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자, 남편 도미는 "제 아내는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라며 나에 대한 믿음을 의심치 않았어. 우리 부부는 권력의 횡포에도 서로를 신뢰했던 거야.

우리의 이야기는 많은 영감을 줬나봐. 고대소설(청화담, 학산고사)과 단편역사소설(아랑의 정조, 박종화), 시(도미네의 떠돌잇길의 노래, 서정주)를 비롯해 무용극과 시극, 야담, 단편소설, 뮤지컬, 창작 발레극 등 다양한 장르로 변형 활용됐거든. 특히 박종화 선생은 '아랑의 정조'(1940년)에서 '아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남편의 직업은 궁중목수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지.

결국 부부간의 믿음과 사랑, 고난극복의 의지, 민중의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이야기야. 누가 또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여성상의 이름을 지어줬으면….



▲화성, 염경애=내 남편 최루백(?~1205)은 효자로 이름이 높아. 화성 봉담에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지.
남편은 고려시대 수원의 아전 상저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냥 갔다가 범에게 물려 죽자 산으로 가서 잠든 범을 도끼로 잡아 죽이고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 장례를 치렀던 거야.

내 이야기는 남편이 쓴 묘지명으로 대신하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했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했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는데 그대를 결코 잊지 못하노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애통하도다."

"내가 '간관(諫館)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라고 하자, 아내는 '문득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쟁론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했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 염경애(廉瓊愛, 1100~1146)는 염덕방(廉德方)의 딸로 25살에 최루백에게 시집왔다가 47살에 별세했다.



▲의정부, 의순공주=평강공주나 선화공주 같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해 아쉽습니다.
저는 급조된 효종의 수양딸입니다. 청나라와 국혼을 치르면서 의순공주라는 작호를 얻었지요. 조선조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단 한 건의 국혼 당사자이건만, 그렇다고 축복받은 결혼은 아니었습니다. 말이 국혼이지 사실은 슬픈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음)하는 치욕적인 항복을 했습니다. 이후 효종 1년(1650년)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서 왕비를 맞겠다는 국혼을 신청했지만 모두 꽁무니를 뺀 가운데 내가 간택 받은 거지요.

내 나이 16살, 청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남편이 결혼 후 불과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다시 부하 장수 보로의 첩실이 되지만 그마저 1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기구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7년 만에 돌아왔으나 오랑캐에게 몸과 마음을 더럽힌 여인으로 지탄받다가 28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나 의정부 금오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여성은 불갱이부(不更二夫)하고 개부(改婦)하지 않았고 남편을 따라 죽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열녀(烈女)를 여자의 최고 덕목으로 강조하던 시절입니다.

그러기에 가혹한 역사에 희생된 여인이건만 환향녀(還鄕女)의 전형으로 손가락질 받은거죠. 저 말고도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은 모두 '화냥년'이라고 모멸을 당했고, 그것은 오늘까지도 부정(不貞)한 여인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잖습니까.

비약일까? '현대판 의순공주'라고 할 수 있는 '양공주' 역시 못난 역사가 만들어낸 슬픈 여인의 자화상은 아닐까요?

■ 의순공주(1635~1662)는 효종의 양녀다. 의정부 금림군(錦林君) 이개윤의 딸로 본명은 이애숙(李愛淑)이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




인터뷰 / 이을죽 경기도 여성가족국장


"한국 여성사 중심 … 저력 살려 사회공헌"


"전통적인 경기여성은 고려·조선시대에는 교육가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조선후기에는 실학자와 열녀, 효부, 효녀, 예술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나라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어머니의 강인함으로 무장해 지혜와 슬기가 살아 숨쉬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을죽 경기도 여성가족국장은 전통적인 경기여성상을 이같이 설명하고 "경기여성이 한국 여성사 흐름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앞으로의 경기도 여성상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성평등 증진을 위해 노력하며 여성의 인권보호와 지위향상, 사회참여 확대 등 여성권익증진에 공헌하고, 불우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면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또한 신지식, 과학·기술, 기업경영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최대한 개발하고 활용해 기업경영 또는 지역경제를 위해 공헌하는 여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경기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전국수준(51.3%)에 못 미치는 48.8%인데, 여성 새로일하기센터와 여성인력개발, 사이버교육 등을 통한 구직희망 여성의 재취업 지원 등 경제활동참여 촉진에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경기도가 원하는 여성상을 길러내기 위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가족 친화적인 기업문화 조성 ▲믿고 맡길 수 있어 부모의 부담을 덜어 주는 다양한 보육정책 실현 ▲출산에 대한 인식개선 사업 전개 등 자기 분야에서 활발히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이동화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