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시인을 추모하며 …  

고 박영근 시인의 시비가 오는 9월1일 그가 살았던 부평, 부평 신트리공원에 세워진다.

나는 그를 '영근이 형'이라 불렀다. 대학졸업반 시절 나는 그의 시집 <김미순전>을 통해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봄볕이 한가득 어깨 위로 쏟아지던 어느 날 나는 교정 잔디밭에 드러누워 그의 시집을 탐독했었다. 그리고 훗날 우연한 기회에 그와 대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영근이 형은 시인 이세기 형에게 전화를 걸어 진보적 문학단체인 인천작가회의를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영근이 형과 이세기 형은 인천에 흩어져 있던 시인과 작가, 평론가들을 만났다. 다수의 문인들이 인천작가회의를 결성하는 것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영근이 형은 그들을 설득해 결국 인천작가회의를 출범시켰다. 인천작가회의 출범 이전에 영근이 형은 인천민예총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인천의 진보적 문예운동은 영근이 형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영근이 형은 술에 취해 있을 때가 온전한 정신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많았다. 그에게 술은 밥이자 양식이었다. 그의 영혼과 육신을 이승의 끈에서 놓게 한 것은 결핵성 뇌수막염이었다. 제대로 곡기를 섭취하지 못한 그의 몸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병마는 쉽게 그의 몸에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상과 결별을 하기 오래 전부터 나는 영근이 형을 만날 때마다 그가 술기운에 의존해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겨우 지탱하고 있다고 느끼곤 했었다.

나는 두 번 꼬박 그와 밤을 새워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아니, 함께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열 시간 이상을 그가 술을 마시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집에도 딱 한번 가본 적도 있다. 그의 초청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그를 택시에 태우고 그의 집 앞에 당도했던 것이다. 기와를 올린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그가 25년이나 살았던 그 집은 양편으로 높은 상가건물에 끼여 마치 영근이 형 자신의 조그마한 체구를 떠올리게 했다. 이세기 형과 그를 들쳐업고 대문을 밀고 들어가 그를 방안 이부자리에 누였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 방은 차디찬 냉골이었다. 오랫동안 홀로 살아왔던 그의 집엔 온기가 느껴지는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전기밥솥 안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먹을거리도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애옥살이였다.

해가 몇 번 바뀌고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올 무렵, 나는 그가 왜 늘 술에 취해 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지독히도 외로웠던 것이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그를 진정으로 따스하게 맞이해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가을밤이었던가? 문예운동을 하던 그의 후배 한명이 시위에 연루돼 경찰서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몇몇이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고 우연찮게 나도 그 대책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결론이 없는 지루한 회의 탁자 앞에 앉아있으려니 나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지나친 감상주의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영근이 형이 술에 취한 채 사무실로 찾아왔다. 양손에 검정색 비닐봉투를 든 채. 봉투에는 소주와 김밥, 튀김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경찰서 앞으로 쳐들어가 연행자 석방 집회나 연좌시위를 할 줄 알고 술과 안주거리를 사왔던 것이다. 그는 "당장 경찰서로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술주정하러 왔냐"는 면박만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 영근이 형의 눈빛에 서린 외로움, 고독의 실체를 보았다.

그렇게 외롭게 그는 문예운동을 함께 해왔던 동지들과 후배들 … , 그리고 그의 고독을 어루만져주었던 한 사람을 두고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의 시 중에 가수 안치환이 곡을 붙여 부른 '솔아 푸른 솔아(원제 '백제6')'라는 시가 있다. 그 시가 시비에 새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에서 그를 고독 속으로 내버려둔 우리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영근이 형의 시비 제막식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이다. 그를 고독으로 내몰았던 서로의 얼굴을 그 자리에서 결코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그를 추억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