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과 떠돌이 - 문동환

찜통 더위였다. 사상 최악의 더위라고 하는데, 아주 아주 오래 전 여름에 나는 사방이 유리로 막힌 건물에서 보름을 일 한 적이 있었다. 사방이 유리로 막혔으니 그것은 열대온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겪었던 더위와 열기, 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요즘 이 더위가 우습게만 느껴진다. 또 고압철탑에 올라가 일을 한 적도 있다. 공중에서 뙤약볕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십분만 있어도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고 혀가 구운 오징어처럼 말린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내놓으려고 헛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그냥 더위 먹었나 보다 여겨라.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세상에 정을 붙일 곳이 없는 떠돌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자 한다. 권력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잣대로 명령하고 핍박한다. 뭐, 그들의 명령이란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을 실현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쥐어짜내기 위해 핍박과 억압이라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떠돌이들, 아웃사이더, 약자들은 만고불변 핍박을 받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자이자 목사, 교수 한때 정치인이었던 문동환의 <바벨탑과 떠돌이>(도서출판 삼인)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저자는 하느님은 언제나 떠돌이들, 약자들의 편이었다고 말한다. 뭐, 이 한 문장으로 오늘 책 소개는 끝이다. 더 부연 설명할 것이 없다. 하느님은 언제나 떠돌이들의 편이라는 것.

저자 문동환은 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다. 미국에서 신학석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가 박정희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되고 투옥되어 2년여를 감옥에서 복역한 훌륭하신 분이다.

잠깐, 민주화운동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 나는 민주인사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교수와 학생을 강단과 학교에서 내쫓고 또한 경찰들이 젊은 여자들의 치마길이를 자로 재고 청년들의 머리칼을 바리캉으로 고속도로를 내는 과거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런 사태들을, 모 정당의 어떤 여인네의 말마따나 불가피한 선택이자 역사가 평가해줄 일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드시 역사가 엄중히 문초하고 단죄해 줄 것이라고.

<바벨탑과 떠돌이>는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다.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선입견이나 반감을 누그러뜨리길 부탁한다. 우리가 반감을 가지고 상대하는 기독교의 굴절과 왜곡의 역사를 신학자이자 목사인 문동환이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출애굽 탈출공동체의 경험을 모델 삼아, 그들이 어떻게 제국에 맞서 싸웠고, 그러나 이후에 왜곡이 되어 파멸하고 말았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성서의 핵심 기독교의 정수가 권력과 탐욕, 욕망으로 상징되는 바벨탑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떠돌이 민중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참고로 나는 현대 대한민국의 언어인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언어인지 실로 이상한 문체로 번역된 성서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바벨탑과 떠돌이>를 읽으면서 단번에 통달하게 되었다. 예전에 영어 하면 <성문종합영어>, 수학 하면 <정석>이 있었듯이 이 책 한권이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한다. 어라, 이거 약장수 멘트다.

그러면 내 머릿속을 관통한 것들이 무엇이냐? 그것은 억압받고,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멸시당하고 있는 모든 약자들이 바로 떠돌이들이며,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과 집단, 이데올로기들, 정치권력들, 부의 독점자들, 물신을 숭배하는 목회자들, 그러한 목회자들의 추종자들이 바로 바벨탑이자 바벨탑을 지탱하는 죄악의 주춧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떠돌이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저자는 "이제 새로운 출애굽 사건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3000여년 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이 재생되어야 한다. 2000년 전에 갈릴리에서 일어나 지중해 연변에 확산되었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재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조혁신기자 mrpen68@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