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스 - 버지니아 M. 액슬린

여행 중에 거리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학교에 가야할 시간에 또는 집에 있어야할 야밤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그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는 커다란 자루를 어깨 너머로 걸쳐 매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빈병과 폐지, 페트(PET)병을 줍던 꼬마 소년이다.

나는 그 꼬마를 2년 전 여행 중에도 만났었다. 2년 전, 그는 아포(Apo) 다운타운가와 네포(Nepo)가를 어슬렁거리며 폐품을 줍고 있었다. 당시에도 그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한밤중에 나는 카지노가 몰려있는 발리바고(Balibago) 거리에서 그를 또 보았다. 그는 또래 넝마주이 소년들 서넛과 함께 있었는데, 한 아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은 아닌 것 같았고 그 아이가 수집한 폐품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2년이 지난 후 그 꼬마 소년이 여전히 넝마주이로 건강히(?) 살고 있는 모습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나는 말보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대지방에서의 사회복지란 겨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 . 어쨌든 겨울의 부재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신의 은총이랄까.

90년대까지 미군이 주둔해 아시아 최대 유흥거리로 유명한 체크포인트 거리를 한밤중에 걷는데 한 꼬마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고 호주머니에서 10페소짜리 동전을 건네주었다. 순간 사방에서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거리의 소년소녀들이 나를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노 머니!"를 외치며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리의 아이들이 넘쳐나는 그 도시에 체류하며 나는 버지니아 M 액슬린의 <딥스>의 책장을 넘겼다. <딥스>는 유아교육계의 고전이자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워낙 유명한 책인데, 어쨌든 나는 내 아이들이 소년이 된 이제 와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딥스>는 부모의 섣부른 기대에 가로막혀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아이 '딥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딥스는 유명한 과학자 아빠와 전직 외과 의사인 엄마 밑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자라는 다섯 살 아이였다. 정신지체로 의심될 정도로 발달이 느린 언어 능력, 비정상적인 행동들, 사람들과의 원만치 못한 관계 등 딥스는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액슬린 박사는 딥스의 치료를 맡게 되는데, 그녀는 '놀이치료'를 이용해 딥스가 부모의 강압에 의해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치료한다. 특히 딥스는 치료 과정에서 부모, 특히 아빠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아빠로 지정한 인형은 모래산 아래에 묻어버렸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설계 놀이에서도 아빠만은 신호등에 가로막혀 집으로 가지 못했다. 아빠를 불난 집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그와 같은 자신의 행동에 심한 죄책감을 가진다. 그러나 딥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오직 자신만이 부수고 나올 수 있는 마음속의 감옥을 하나씩 차례로 부수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온다. 마음속의 미움과 두려움이 사랑과 자신감으로 바뀔 때, 딥스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아를 찾는다.

당시 나는 책을 읽으면서 딥스가 "나는요, 모든 아이들이 자기만 오를 수 있는 동산을, 하늘 위에 별 하나를, 나무 하나를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어쩌면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거리에서 만난 넝마주이 꼬마 소년과 체크포인트 유흥가에서 손을 내밀었던 소녀를 그리고 거리의 소년소녀 꼬마들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자기만 오를 수 있는 동산과 별, 나무를 꼭 하나씩은 가져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그 말은 곧 모든 인류가 자기만 오를 수 있는 동산과 별, 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