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두 할아버지 중 어느 한 분한테서라도 『오냐, 내가 뒤를 봐 줄 테니까 너는 여기서 생활해라』 하는 한 마디만 받아내면 그는 평양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생각 때문에 벗어놓은 시계도 다시 찼다. 기차표를 끊을 수 있는 돈도 누나 몰래 챙겨 넣었다. 공화국의 영재들만 입학이 가능한 평양제1고등중학교 6학년 1반에 재학중인 학생증이 있으므로 공민증과 여행증명서는 떼지 않아도 평양까지 열차여행은 가능했다.

 그렇지만 인숙은 동생의 그런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집안에 들어박혀 있으니까 갑갑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동생이 벗어놓은 시계까지 차고 밖으로 나가도 별로 이상한 느낌도 없이 문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오마니 아버지 걱정하시지 않게 빨리 들어와….』

 인숙은 복도 층계참까지 동생과 함께 걸으며 집안이 어려울수록 자식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드려야 한다면서 누나로서 동생의 불같은 성격만 타일렀다.

 『알았어.』

 인영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와 사회안전부 아파트단지를 빠져 나왔다. 아파트단지 앞에서 조금 걸으니까 큰길이 나왔고, 콘크리트로 포장해 놓은 큰길 위로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려 퍼붓고 있었다. 인영은 학교 기숙사나 도서관 같은 실내에서 공부만 해서 그런지 강렬한 햇볕이 싫었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큰길을 따라 한 5분쯤 걸어 올라가다 건늠길(횡단보도) 앞에서 큰길을 건너갔다.

 문득 새별인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유학을 떠났던 6년 전이 생각났다. 영재들만 입학이 가능한 평양제1고등중학교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복무하던 안전원 아저씨들이 이 버스정류소까지 따라나와 『우리 은혜읍과 낙원군의 명예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고 격려해주던 시절이 영화 장면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그때는 그렇게 영웅 대접을 받으며 이 길을 걸어갔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달아나듯 이 길을 지나가고 있을까?

 인영은 급히 길을 걸으며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가족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가 바라는 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형만 조국을 배신하고 남쪽으로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형 때문에 그는 가고 싶은 김일성종합대학도 못 가고 현재 다니고 있는 평양제1고등중학교도 졸업할 수 없게 되어 할아버지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형이 자꾸 원망스러웠다.

 형은 왜 조국을 배신하고 남조선으로 넘어가서 가족들 전체의 앞날을 이렇게 망쳐 놓을까?

 4년 전에 헤어진 형의 얼굴이 그렇게 밉게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