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가서스 10000마일 - 이영준


몇해 전 함께 천막에서 겨울을 보냈던 후배가 페이스북에 근황을 남겼다. 영국 브리스톨 항구에서 예쁜 영국 아가씨들과 포즈를 취한 사진과 함께. 후배는 바다 사나이다. 그는 3등 항해사로 선박에 몸을 싣고 벌써 1년이 넘게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다. 사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도와 너울, 풍랑이 끊이지 않는 대양 위를 떠돌고 있다. 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후배의 사진을 보며 <캐리비안 해적>의 잭 스패로우 선장, 또는 악마와 계약을 맺어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최후의 심판일까지 바다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방랑하는 화란인' 선장을 떠올린다.

후배의 소식을 접할 즈음, 나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기계 가운데 가장 크고, 바다 위를 떠가는 선박 중에 가장 큰 축에 속하는 컨테이너선 페가서스호에 오른 이영준이라는 사나이의 항해기 <페가서스 10000마일>(도서출판 워크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페가서스 10000마일>은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컨테이너선 페가서스를 타고 한 달간 대양을 횡단하며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견문록이자 기계비평서다. 기계비평가란 뭐하는 작자이며 기계비평이란 또 뭔 소린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기계비평가와 기계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연히 기계에 대한 개념 정립이 요구된다. 기계란 무엇인가? 저자는 기계란 자연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적확한 표현이다. 자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 기계를 도구라고 배웠다. 기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인간 존재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자연의 일부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 지구에서 제1의 존재가 자연, 제2의 존재가 인간이라면 기계는 제3의 존재인 것이다. 표면상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기계는 생명이 있다. 인간이 존재하고 호흡을멈추지 않는 이상 기계는 생명을 획득하고 있다.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자. 기계가 생명체라는 사실을, 기계가 인간의 뇌와 심장, 근육, 혈관, 골격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페가서스 10000마일>은 내게 사유의 폭을 넓혀준 책이다.

저자 이영준이 페가서스호에 올라타기까지 5년이 걸렸다. 선장이나 항해사, 선원이 아닌 자가 배를 타기란 일반인이 우주왕복선을 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는 우리가 기계의 숲 속에서 살고 있지만 막상 기계라는 스펙터클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거대한 기계들의 메커니즘을 전혀 접하지 못한 채 기계와 더불어 살다가 생명을 다한다. 하다못해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전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표면만을 더듬었을 뿐 그 본체와 본질을 본 적이 없다. 자, 이제 기계비평가의 존재 이유를알 것이다. 기계비평가는 장님(일반인)에게 코끼리(기계)의 형상과 본질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기계비평가의 눈으로 21세기의 항해를 관찰한다. 대항해시대의 항해 기술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고 배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에 따라 바다의 노동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그리고 길이 363m, 무게 13만 t, 10만 마력의 엔진을 장착한 페가서스호에 올라타 63빌딩보다 더 큰 이 선박의 본질을 관찰한다. 연료, 전기, 물, 음식은 물론이고 소리, 빛, 바다색, 항구와 바다의 미신에 이르기까지 항해라는 판타지가 오늘날 어떤 식으로 변해서 남아 있고, 거기서 인간은 바다와 기계를 상대로 어떤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저자(또는 우리)에게 기계란 어떤 존재일까? 이 거대한 괴물 페가서스호가 전속력으로 달리다 완전히 멈추는 데 무려 16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은 세상에 어떤 것도 페가서스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저자는 "인간은 힘과 크기에서 인간을 완전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기계를 만들어놓고 그 기계를 제어하느라 투쟁하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 제어되면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길이 363m, 무게 13만 t의 배는 그런 투쟁의 현장이었다"고 말한다.

기계와의 투쟁? 하지만 놀라지는 말자.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처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일은 전혀 없다.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일 뿐이다. 어쨌든 일독을 권한다.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