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연평도의 갈매기섬에는 5천여마리의 괭이갈매기가 둥지를 틀고 서식하고 있다. 괭이갈매기들이 모여 하늘과 섬을 뒤덮고 있다. /사진제공=청소년기자단 파랑
   
▲ 청소년 기자단이 조기 박물관에 세워진 기념비 앞에 모여 환하게 웃고 있다.
   
▲ 주민들이 마을의 주 수입원인 꽃게를 손질하고 있다.
   
▲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지붕이 무너진 채 방치된 집.


바다에서 인천의 미래를 보다 - 2. 연평도


1960년대 조기파시 성황

전국서 5만 명 몰려 장사진

어획량 감소로 꽃게잡이 전환

새해 '풍어제' 관광객 사로잡아

지역 대표문화 자리매김

김만중·기형도 문학인 배출도



서해 5도 중 하나인 연평도.

분단의 아픔과 함께 지역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조기 파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과거의 영광도 품고 있다.

지난달 26일 청소년 인천섬 바다 기자단 '파랑'은 연평도를 찾았다.

연평도 주민들의 삶과 빛나는 인천 앞바다의 잠재성을 확인했다.


▲한 달 벌어 1년을 먹던 조기 파시 연평도

이날 오후 4시 연평도 선착장 옆 당섬으로 향했다.

본섬인 안목과 당섬 사이에는 길게 그물이 쳐 있었다.

이게 안목어장이다.

안목어장은 유명한 설화를 품고 있다.

조선 인조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세자를 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향하던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를 건너던 중 식량난을 겪게 됐다.

임경업 장군은 부하들에게 지금의 안목어장에 가시나무를 그물 처럼 엮어 덫을 놓게 했다.

가시나무에는 안목어장을 지나던 조기들이 한 가득 걸렸다.

설화에서도 나오는 것 처럼 연평도는 조기 파시(波市)로 불릴 정도로 과거 큰 영광을 누렸다.

양쯔강 하구에서 겨울을 난 조기들은 제주도를 지나 칠산어장, 죽도어장을 거쳐 산란기인 5~6월 연평 앞바다로 올라왔다.

전성기였던 1960년 대만 해도 3천여 척의 어선이 조기를 잡기 위해 연평도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상인들과 술집 등 전국 각지에서 5만 명 이상이 몰려 들어 그야말로 장사진이었다.

'연평도에서 한 달 벌어 1년을 먹는다'란 뉴스 보도가 날 정도였다.

아이들은 알 밴 조기 1마리를 찐빵과 바꿔 먹기도 했다.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황금 바다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연평도 뱃노래)', '연평도 물이 마르면 말랐지 내 주머니 돈이 마르랴.(연평도 니나나타령)' 등 당시의 노래들도 연평도의 모습을 대변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어획으로 1968년부터 조기는 자취를 감췄다.

이후 연평도 어민들은 꽃게 잡이로 방향을 바꿨다.

최근 모습을 감췄던 조기들이 조금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유의 문화를 간직한 연평도

안목어장 전설 때문에 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매년 새해가 밝아오면 풍어제도 지내고 있다.

연평도의 풍어제는 전 마을 주민이 나서 준비를 한다.

전국 최고의 만신이 아니면 나서지도 못한다.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은 행사이기 때문에 매년 풍어제가 열릴 때면 연평도에는 전국에서 모인 관광객들의 발길로 혼잡하다.

하나의 연평도 대표 문화인 셈이다.

연평도는 문학인들과 많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학계에서는 구운몽으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이 한때 소연평도에서 생활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김만중의 호가 서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포. 즉 서쪽의 포구란 뜻으로 소연평도를 뜻한다.

물론 학계는 이에 대해 여러 의견들을 내놓고 있지만 김만중이 한때 소연평도에서 살았다는 설은 어느 정도 힘을 받고 있다.

또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유명한 기형도 시인 역시 연평도 출신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크로테스크한 시어로 젊은 층의 감성을 자아내며 문학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 두 문학인은 연평도와 큰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아쉬움이 남는다.

타 지역은 유명한 문학인을 배출했을 경우 이들을 이용해 지역을 알리려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옹진군은 현재까지 이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생전 살았던 과거의 행적과 그 추억을 활용한다면 연평도는 또 하나의 역사를 가진 섬으로 탈바꿈 할 수 있다.

이세기 시인은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이 두 사람이 성장한 곳이 바로 이곳 연평도다"라며 "하지만 연평도에는 이들을 기리는 흉상 하나 없다. 이들을 간직하고 널리 알리는 것 만으로도 연평도는 많은 광고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고유의 건축물 등 과거 지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도 지역 문화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연평도 해안가에는 녹슬은 고철더미가 한 가득 쌓여있다.

관리가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관리와 복원은 관광 도시로 가는 필수 항목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연평도=이재필기자 ljp8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