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혁

돈을 주고 샀든 선물을 받았든 아니면 공짜로 얻었든 내 서재에는 읽지 않고 처박아둔 책들이 수백 권이나 된다. 책은 내 마음의 양식이지만 짐이기도 하다.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시간들은 행복하고 평온하지만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나 좀 읽어다오"라며.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책들 중에 김중혁 장편소설 <좀비들>을 꺼내 읽었다. 먼저 소감을 말하자면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 책이 수준이 떨어지거나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순전히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뿐. 여기서 잠깐 밝히자면 내 취향에 맞는 소설들은 치열한 인간 삶이 담겨 있는 것들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본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같은 작품이다. 이런! 독자들이 고바야시 다키지를 모를 수도 있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제국주의 시절 사회주의계열의 작가였다. 그는 일본 고등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좀비들>은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과는 방향성이 전혀 다른 작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작품이랄까. 아니, 일본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들과 같은 풍이다. 뭐,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반화이다.

<좀비들>에선 좀비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주변인물들일 뿐이다. 주인공은 휴대전화 수신감도 측정일을 하는 채지훈과 번역가 홍혜정, 도서관 사서 뚱보130이다. 그리고 이밖에 인물들. 소설의 무대는 전파가 잡히지 않는 고리오마을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거기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현실과 무관한 좀비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니, 좀비들은 군인들에 의해 사육되고 신무기 인체실험용으로 사용되는 도구이다.

고리오마을과 그곳의 주민들, 좀비들이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이 소설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김중혁이 펼쳐놓는 엉뚱한 사건을 따라가면서 고리오마을의 주민들과 좀비들의 관계를 추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미스터리가 숨겨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번 책을 내려놓았다. 쉬면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목련꽃차를 우려 마셨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지극히 대중문화 코드에 충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대중문화 코드'란 '소비'다. 현대인은 삶의 가치와 만족을 소비를 통해 얻는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가 문화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같은 대중문화 코드를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나 역시 소비하며 삶의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좀비들>의 매력은 대중문화 코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60년대 영국 록그룹 스톤플라워(이런 밴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확인불가다)의 음악들과 커피, 베이글 등등. 우리가 누리고자 갈망하는 개인적인 삶과 시간들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고독하다. 거기엔 삶의 본질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작가 김중혁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허감, 즉 본질의 공허감을 좀비라는 가상적인 장치를 통해 보완한다.

작가 김중혁은 이 소설을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는 대중문화 코드라는 계단을 밟고 인간본질의 심연으로 도약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사람들,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성이 잊혀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세계를 향해 수줍게 도약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다시 책장을 덮고 오디오에 CD 한 장을 넣고 음악을 듣는다. 우리의 기억에서 존재성을 잃은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누군가? 왜 그들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무존재로 여겨지는가? 좀비들 … . 좀비라는 메타포로 대체된 현실존재가 누구인지.

나는 노트 위에 펜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낸다. 청소부, 택배기사, 화물차 운전사, 편의점 알바생,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노점상, 행상, 외판원, 해고노동자 등등.

자, 소설의 결말로 가 보자. 주인공 채지훈은 록그룹 스톤플라워의 음악을 스피커가 찢어져라 틀어놓고서 수백 명의 좀비들과 함께 어디론가를 향해 떠나간다.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