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데이비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지난 겨울 혹독했던 추위에 대한 잔상이 뇌리에 남아선지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우연이었을까. 자메이카 출신의 전설적인 레게 가수 밥 말리(Bob Marley)의 노래 '노 워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를 들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산더미 같은 크기로 밀려드는 고독을 느꼈다. 소름이 돋는 고요가 태풍의 전조이듯이 그 고독은 지상을 새카맣게 뒤덮는 검은 그림자로 먼저 다가왔고 이어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그리곤 고독은 나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런 질식 상태에서 나는 하루 종일 수십 번 반복해서 '노 워먼 노 크라이'를 들었다. 아니 귀로 들었다기보다는 숨을 쉬듯이 나는 그의 노래를 호흡했다. 그의 노래를 듣지 않고는 나를 덮친 고독의 정체를, 그 실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추위를 잊은 채 새벽까지 오직 밥 말리의 '노 워먼 노 크라이'를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내 고독의 실체를. 밥 말리의 노래는 처음엔 내게 산더미 같은 고독감을 안겨주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물줄기가 터진 듯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에는 내가 걸어왔던 짧지만 길었던 삶을 반추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밥 말리의 노랫말처럼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번 주 '책과 사람'에서는 '레게의 영혼' 밥 말리에 관한 평전 <밥 말리 -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여름언덕)를 권한다. 또한 밥 말리가 1974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 앨범 <내티 드레드(Natty Dread)>도 추천한다.

밥 말리는 1945년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빈민가에서 태어나 1981년 갑작스런 뇌종양으로 3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한다. 생전에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일주일에 겨우 20실링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도 멍청한 바보가 되었겠지요"라는 그의 말처럼 그에게는 오직 영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노래로 저항하고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과 민중에게 희망을 전했다. 짧은 인생을 살다간 그였지만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는 카리브해를 건너 미국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여기서 잠깐 레게음악에 대해 짧게 언급하자면 레게는 한가한 사랑타령이 아닌 저항 그 자체로 정의할 수 있다. 한때 우리나라 가요계에도 레게음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김건모의 빅히트 곡 '핑계'를 위시해 수많은 가수들이 레게리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들의 노래는 거의 모두 사랑타령에 불과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패션과 헤어스타일에도 레게 스타일이 유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지 진정한 레게는 결코 아니었다. 미국 흑인들의 저항의식을 담은 힙합이 우리나라에서 댄스음악으로 변질된 것과 마찬가지리라.

다시 밥 말리의 생애로 돌아가자. 그는 자메이카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그에게 노래는 사회 참여이자 저항의 도구였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인 인민국가당(PNP)을 지원하는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친미우익계의 총기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 테러로 밥 말리와 그의 부인이 크게 다치는 부상을 입는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밥 말리는 이후 2년 동안 영국으로 망명길을 떠난다. 이후 고국 자메이카로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다시 이렇게 노래한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No woman No cry)/모든 것은 잘 될 거예요.(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