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4·13 총선의 특징을 꼽으라면 시민단체 낙선운동에 따른 다선 의원들의 몰락과 함께 지역구 의원에게 도전장을 낸 전국구의원들의 압승 등이다.

 인천 연수구의 한나라당 황우여 당선자도 지역구 의원인 민주당 서한샘 의원에게 도전, 압승을 거두며 전국구란 꼬리표를 뗐다.

 사실 전국구 의원인 황 당선자가 지난 98년 6월, 연수구에 지구당 사무실을 냈을 때만 해도 그의 당선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를 보좌하는 측근들조차도 『당시 당선 가능성은 0%』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그는 1년6개월이란 짧은 지역구 활동에도 불구, 경쟁 후보를 무려 1만7천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는 무서운 저력을 발휘했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진 인천을 강한 인천으로 만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당선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황 당선자가 주장하는 강한 인천론은 무엇일까.

 그는 『죽산 조봉암과 장면이란 정치적 거물을 길러낸 인천은 이들 이후 인맥이 단절돼 지금까지 30여년간 목소리 없는 도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천은 특히 영·호남, 충청출신 등이 다양하게 모여 살아 정권 창출의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인물이 없다보니 지난 10년동안 장관 1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도시가 됐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강한 인천론은 인물론으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황 당선자는 강한 인천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인물을 만드는 메이커 일 뿐』이라고만 했고 이는 인천이 집권 가능한 인물을 밀어줄 때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가 말한 집권 가능한 인물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다. 그는 이총재를 위해 20여년간 입었던 법복을 미련없이 벗어던질 만큼 이총재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 이총재도 15대 총선때 이총재의 몫이었던 전국구의석 단 한자리를 황 당선자에게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때문에 그는 이총재의 측근중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황 당선자와 이총재와의 첫 만남은 그가 남부지원 단독판사이던 지난 79년 이뤄진다. 황 당선자는 독일에서 헌법을 전공하고 귀국해 남부지원에 발령됐고 이총재는 당시 지원장이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헌법을 전공한 몇 안되는 판사였고 이총재는 이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서로의 신뢰를 쌓게 됐다. 하지만 그들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황 당선자의 소신판결로 잘 알려진 「MBC 판결」이 계기가 됐다

 그는 서슬이 퍼렇던 신군부시절, 신군부가 강제로 빼앗은 MBC 주식을 주주들에게 돌려주라고 판결, 사법부 최고위층의 눈 밖에 나게 돼 결국 서울 가정법원으로 좌천되는 등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당시 대법관이었던 이총재에게는 그를 더욱 소신있는 법관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황 당선자는 이같은 인연으로 이총재가 YS정부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이 되자 그의 권유로 법복을 벗고 감사위원이 되고 정계에도 함께 들어가 비서실장이 됐다.

 소신과 정의, 의리를 특히 강조하는 정치인, 또한 한번 결정(그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다)하면 거침없이 추진한다는 황 당선자는 『반드시 강한 인천, 힘찬 연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최창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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