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춘 (인천남구 주민)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는 태극도가 들어 있는데 동심원 4개를 그리고 두번째 큰 원부터 좌우로 명암을 나눠 번갈아 가며 가장 큰 원까지 양(陽)과 음(陰)을 표시하였다. 백색이 양이고 흑색이 음이며 양은 동적이고 음은 정적이다.
밥그릇의 평면도는 원형이라고 본다. 절에서 쓰이는 밥그릇을 발우 또는 바리(때)라고 하고 가정에선 밥그릇으로 주발, 국그릇으로 대접을 사용한다. 수저통에는 숟가락, 젓가락, 주걱 등을 넣어두고 국자를 벽에 걸어 놓기도 한다. 사발은 사기로 만든 국그릇이나 밥그릇인데 백색이 대부분이고 손으로 잡는 부분에 채색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木鐸)이다. 세상사람을 깨우쳐 바르게 인도할 언론기관에서 발행한다. 인천 남구청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나이스 미추(Nice Meet You)'는 무슨 뜻일까? '당신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천의 남산 문학산에는 비류(沸流)왕릉 고적지가 있다. 홀(忽)자는 홀연히, 소홀하다 등에 쓰이는 글자인데 홀대받고 있다. 미추홀 표기에서 빼놓고 있으니 좋은 미추홀이면 나이스 미추홀(Nice Michuhol)이어야 하고 '당신을 만나서 반갑습니다'면 나이스 투 미추(Nice to meet you)가 되어야 한다.
남구 학익2동 미추홀공원에 '숲속의 작은 도서관'을 신사처럼 지어놓고 책들을 조금 진열해 놓았다. 운동기구가 신설된 체력단련장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어린이놀이터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여가를 즐기는 아낙네들도 있으며 해마다 가을에는 노인복지회관 노인들이 음악회를 열고 바자시장도 늘어 놓는다.
주몽의 맏아들 비류왕자가 미추홀 국왕을 지낼 때 어머니 연소서노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향하였다니 효도의 풍습은 산속에서도 퍽 오래되었다.
백제의 왕들의 성씨는 부여씨라고 한다. 근초고왕이 부여 구이고 근구수왕이 그의 아들이다. 근초고왕의 부친이 백제의 제11대 비류왕(比流王)이니 미추홀국 비류왕과 구별하기 위해 미추홀왕이라고 하며 비류왕릉을 미추홀 왕릉이라고 해야 한다.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의 남부도위인 산동지역의 대방에 의탁하게 된 비류는 우선 낙랑과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낙랑의 간섭이 계속될 것을 염려해 온조에게 백성의 절반을 내주고 마한땅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할 것을 명령한다.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고 누차에 걸쳐 낙랑의 침략을 받던 비류는 더이상 대방땅에 머무르지 못하고 일부 신하와 군사들만 이끌고 온조에게로 향한다. 비류 일행은 임시로 미추홀(인천)에 머물면서 온조가 자신들을 맞아들일 날만 기다린다. 온조가 왕위를 내주기 싫어 비류일행을 받아 들이지 않자 이에 분개한 어머니 소서노는 갑옷을 입고 군사들을 진두지휘해 온조가 다스리는 위례성을 공격하지만 패배하고 전사한다.
미추홀에 머무르고 있던 비류는 소서노의 전사소식을 듣고 달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편 서두에 '그는 이 곳 도입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백제가 온조를 시조로 삼는 것은 백제라는 국호가 온조대부터 사용되었고, 또 온조의 후예들에 의해 왕위가 전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봐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비류로 보는 것이 옳다.
/장영춘(인천남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