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환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깊어가는 가을, 사색의 단풍 빛에 물들려면 철학책 한권쯤 소개하는 게 온당할 듯싶으나 섣불리 난해한 철학책을 소개해 독자들의 뇌압을 올려놓을 우려도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철학적 사유가 물씬 묻어나는 산문집 한권을 소개한다.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도서출판 삼인)라는 예술 산문집인데 이 책의 저자는 우리 문단의 마당발이자 마당쇠(실제 보면 진짜 마당쇠처럼 생겼다)인 시인 김정환이다. 시인하면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이육사, 서정주, 김춘수 정도밖에 떠올리는 우리의 애매모호한(?) 독자들에게 김정환이란 이름은 생소할지 모른다. 허나 김정환, 이 사람 정말 '포스'가 대단한 사람이고 지적 사유의 깊이와 폭은 깊고도 넓다. 외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도 대단하다. 몸 체형을 말하자면 짧고 굵으면서 펑퍼짐하다.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는가? 항아리를 연상하면 된다. 이제 책 이야기로 바로 쏜살 같이직행하자. 자, 버스 출발한다.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는 시인이자 소설가, 진보적 문화예술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해온 시인 김정환이 문단과 예술계에서 만난 다양한 문인과 화가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그들의 작품인 시집과 시, 소설, 그림 등 문화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버르장머리 그러니까 예의범절 따위는 동네 강아지에게 던져주었는지 한국문단의 거장들과 시도 때도 없이 '맞짱'을 떠왔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대거리를 붙은 적도 있고 맨 정신에 객기로 붙은 적도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 문인들 중 그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책은 미술평론가 김윤수,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고 채광석, 소설가 고 이문구, 화가 임옥상, 시인 이시영 등 시대를 이끌어 간 시인과 화가들의 이야기들로 시작된다. 아울러 문학에는 그야말로 눈곱만큼, 어림 반 푼 닷곱도 없이 관심이 전혀 없었던 저자가 어떻게 문학의 길로 들어가게 돼 지금까지 문단판에서 굴러먹고 있는지 재밌는 일화를 곁들여가며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저자는 우습게도 대학시절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할복자살한 김상진 열사의 추도시를 쓰면서부터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나마 그 추도시도 누군가의 대타로 썼던 것이다. 그는 그 일로 수배를 당하고 감옥에 가게 된다. '유신대마왕' 시대엔 추모시를 써도 감옥에 끌려갔다.

어쨌든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그는 옥살이 이후 바로 군대로 직행했다. 물론 법을 무시한 강제 징집이었다. 역시 '국민'들 잘 먹고 살게 해 준 유신체제는 헌법이고 법이고 인권이고 없다. 참 대단하다. 그는 군대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애인에게 연애편지를 써 보내게 되고 그 연애시들을 단 한 줄씩 고쳐서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한다.

시인이 되고 난 후 그는 생맥주를 속도전으로 마셔대는 소설가 이호철, 학구열과 술기운 혹은 술주정을 기묘하게 결합하는 소설가 박태순 등을 비롯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을 총망라해 만나게 되며 그 일화들을 주절주절 꺼내놓는다. 그런데 소설가 조경란과의 만남과 그녀와 부둥켜안고 춤을 춘 사실을 자신의 미묘한 심리변화까지 드러내면서 장황하게 할애하고 있다. 웬만하면 남의 글 칭찬에 매우 인색한 그가 그녀의 글을 호평까지 하면서 말이다. 역시 여자는 예뻐야 하나 보다.

이와 같은 문단과 예술계의 일화만을 들려준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책으로 본 기자의 눈밖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헌데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숨결과 애잔함, 추억담이 담겨 있다. 또한 삶의 철학이 진지하게 머물고 있다.

그는 "예술 장르는 이 세상 모든 삶의 액정화고, 그 액정화 속에 둘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만 양극단, 혹시 그 너머에까지 달하는지 모른다. 그 둘 사이를 춤이 춤답게 음악이 음악답게 소설이 소설답게 결국 흐른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라고 말한다. 꼭 읽어봐라. 강추다.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