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의 팔뚝을 부여잡고 아니면 팔뚝에 질질 끌려서 아니, 몸뚱어리를 부둥켜 안고서 혹은 대롱대롱 매달려서. 그러나 멀리서 보면 멋진 춤사위로 보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들은 아니 모든 사람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빙글빙글 돌면서 알 수 없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마터면 나도 그럴 뻔 봤습니다. 휴 다행이다. 이제 끝나니 참 시원합니다. 그동안 내 그림이 지겨웠지요? 김충순 그림 2011, 켄트지 21x29㎝, 연필, 수채.

택시를 타고 초이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다다는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풍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자기 자신마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 자신은 비현실의 공간을 부유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무너진 곳에 그는 있었다. 이 택시는 어디로 가는걸까? 국경선을 넘어 우주의 낯선 공간으로 그를 데려갈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어디에나 경계선은 존재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낯선 동네였다. 바다 냄새가 났다. 멀리 항구가 보였고 커다란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낯익기도 했다. 낯설면서도 동시에 낯익은 이 느낌, 이것은 무엇인가?

다다는 초이가 불러준 주소를 들고 건물을 찾았다. 10층이 넘는 높은 아파트먼트였다. 다다는 입구에 서서 7층의 벨을 눌렀다. 기운 없는 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딸깍, 문이 열렸다.

로비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4명 정도가 타면 꽉 차는 비좁은 엘리베이터였다. 역시 이중으로 된 문이었다. 밖의 문을 닫아야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엘리베이터는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삐끄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는 건물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태양까지 수직으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


초이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녀에게서는 낯선 이방인의 냄새가 났다. 이곳에 있지만 저곳에 있는 존재. 내 눈에는 보이지만 본질은 사라진 어떤 형상이 다다의 눈 앞에 있었다.

초이와 눈이 마주쳤다. 초이는 우는듯 웃는듯 얼굴을 찡그렸다. 다다는 말없이 초이를 끌어 안았다. 그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다는 초이와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을 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이 느낌 때문에 키스를 하는거다. 키스는 상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노크였다.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초이는 거부감 없이 다다의 노크를 받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초이는 다다를 탁자로 안내했다. 그는 의자에 앉았고 초이는 커피를 탔다. 방안에 커피 냄새가 감돌았다. 방안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침대 하나, 탁자와 의자, 그리고 벽장. 그것이 전부였다.

눈에 띄는 것은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가방이었다. 바퀴 달린 그 가방은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완료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다는 생각했다. 이제 초이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이 지나면 영원히 그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떠나는 자를 위하여 길은 있다.

"춤추고 싶어요."

초이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탱고 음악을 플레이했다. 'Ventarron'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초이가 좋아하는 곡이다. 다다는 초이와 마주 섰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초이의 등을 감싸안으며 깊숙이 아브라쏘를 했다. 초이의 가슴이 다다의 가슴에 닿았다. 처음 그녀와 홀딩했을 때의 느낌이 생각났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탄력 있는 공처럼 그의 가슴에 부딪혔을 때 그의 심장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움직인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신호였다.

다다와 초이는 서로 가슴을 밀착하고 탱고를 추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기적이다. 하나의 인간이 다른 인간과 완벽하게 호흡의 일치를 이루며 함께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탱고를 추다보면, 그러나 완벽하게 서로의 몸이 맞는 순간이 있다. 그때의 짜릿함은 섹스로 얻는 오르가즘을 훨씬 상회한다.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일치되는 그 순간, 우주의 문이 열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닫힌 벽 사이에 교량이 설치된다.

다다는 초이와 탱고를 추면서 이 지상의 모든 상처 위를 가볍게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라고 시인 랭보는 말했다. 탱고는 상처를 치유하는 춤이었다. 누구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상처는 영혼을 갉아먹고 좀도둑처럼 몰래 기어다니며 가슴 속을 텅 비게 만든다. 한 곡을 추고나자 이상하게 몸이 가뿐해졌다. 다다는 초이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초이는 다다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곡이 흘러나왔다. 'Hotel Victoria'라는 곡이다. 이것은 다다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아아, 초이는 이미 다다가 올 것을 생각하고 다다와 함께 출 곡까지 정해놓은 것이다. 다다는 깨달았다. 이것이 초이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춤이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자, 한 스텝 한 스텝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다다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춤을 추었다. 블랙홀처럼 무섭게 빨려들 듯한 집중의 순간만이 탱고를 탱고답게 만든다. 쿵쿵쿵쿵. 초이의 가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거추장스러운 장벽에 불과했다. 스텝을 밟으며 서로 완벽하게 하나가 되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옷은 이미 사라지고, 알몸으로 서로를 껴안으며 완벽하게 하나가 된 느낌이 든다. 지금이 그랬다.다음 곡, 또 다음 곡. 다다는 초이와 네 곡의 탱고를 추었다. 보통 밀롱가에서 흘러나오는 한 딴다를 춘 것이다. 춤이 끝나자 초이는 다다를 껴안았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초이가 말했다.

"고마워요."
다다는 자신의 몸에서 멀어지는 초이의 손을 붙잡았다.
"가는거야?"
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함께 가면 안돼?"
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다다는 그 순간 작은 빛을 발견했다. 초이의 눈동자 속에서 망설이는 작은 흔적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나랑 함께 서울로 가자."
초이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머물지 못하는 사람은 저기에서도 머물 수 없어요. 저는 가야할 데가 있어요."
"나랑 같이 가면 안돼?"
초이는 다다를 보고 웃었다. 다다는 그녀가 울었는지 웃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고마워요. 여기까지 와줘서. 나와 함께 탱고를 춰줘서. 마지막 춤은 다다랑 추고 싶었어요."
다다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초이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보았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야 돼요."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땅으로 내려왔다. 모든 것은 허공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함께 탱고를 추었던 허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해가 졌다. 그리고 택시는 떠났다. 다다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이 길 위에 존재했던 것일까.




※소설 탱고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님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