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들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끼리도 비슷한 종족끼리는 견제구를 던진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계속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일지도, 드러나는 이유는 없고, 그야말로 그냥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켄트지 290X210㎜, 연필, 수채, 김충순 그림 2011.


밤늦게 갑자기 고객에게서 전화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고객들과 철저하게 인터넷 비공개 카페를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기 때문에 내 개인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나와 특수한 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아주 심각한 문제로 내가 상담을 해준 경우에 제한되어 있다. 탱고 추는 것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나를 호출한 사람은 24살의 여성 고객 A였다.

내가 A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가 마치 친딸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처음 가진 여자가 수술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 그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처럼 죽음에 대한 상담을 해주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후 나는 개인적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었다고 자부한다.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누구나 인간다운 존엄성을 갖고 죽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갑자기 치명적 간경화의 위험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은, 나의 인생은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당신 생명은 6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고를 받는다면, 60세가 넘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이전의 나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우선 '왜 내가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는가'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내가 잘살았는지는. 하지만 내 기준으로 나는 열심히 살았다. 물론 열심히 산 것과 잘 살았다는 것은 다르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은 경우도 있고, 술 마시다가 옆 테이블 사람들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파출소까지 간 적도 있다. 술 마시고 인사동을 지나가다가 외제차를 발견하고 괜한 객기를 부리며 그 차를 걷어찼다가 차주인의 신고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한 후 훈방된 경우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 문제였다.

나는 일생 동안 많은 여자를 만났다. 내가 특별히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정도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단점이라면 성격이다. 나는 주변의 여자들과 쉽게 사랑에 빠졌고, 정신없이 그녀들과 섹스를 했다. 발정한 종마처럼 날뛰지는 않았지만, 낯선 육체가 만나 이루어지는 하모니의 신비에 이끌렸다.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자를 꼽으라면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한 명은 물론 결혼한 내 전 부인이다. 또 한 명은 대학 강사시절,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학생 초이다.

사실 나는 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성적으로 숙맥이었다. 여러 여자들을 만났고 함께 잤지만 진정한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초이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남자 경험이 없었다. 처음에 나는 그녀를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아, 물론 학교에서도 가르쳤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모텔 침대 위에서 가르쳤다. 맹세코 그녀처럼 학습 능력이 좋은 학생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그녀는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서 그 분야 최고의 경지에 올라섰다. 나는 초이가 없으면 잠시도 숨쉴 수도 없고, 눈뜨고 살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초이가 없는 순간이 두려웠다. 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내 삶에서 차지하는 초이의 비중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초이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십년 넘게 흘러온 초이와의 관계를 여기서 상세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보다는 내 삶의 마지막 변화를 기술하려고 한다.

내가 어떻게 탱고를 만났고, 왜 아르헨티나 지사로 자원해서 오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내 삶의 마지막을 향해 이렇게 달려가야 하는지를 나는 작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A는 참으로 연약한 심성을 가진 여자였다. 나는 상담을 해주다가 사실은 그녀가 정말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자살 의뢰인들처럼 그녀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보통의 외모, 보통의 학력, 보통의 직장 … 누구도 특별히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삶에 지쳐갔고 자신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 존재라면 없어지는게 더 낫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을 해온 이유였다.

나는 그녀와 마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도로 중앙에 있는 버스 정류장은, 밤 늦은 시간에는 너무나 한적하고 조용하다. 정류장 양쪽으로는 차들이 오고 가지만 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군중 속의 고독처럼, 도시의 섬처럼, 버스 정류장은 도로 한 복판에 길죽하게 떠 있다. 나는 길가에 주차를 하고 지정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광고 간판을 보고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일 만나기로 하셨잖아요. 이렇게 계획을 급하게 수정하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원하는 바로 그곳이에요."
"아무리 맘에 들어도 계획을 수정하면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전, 하루가 급해요. (남자 대답이 없다) 추가 비용 필요하시다면, 지불할게요."

그녀는 지갑을 꺼낸다. 그녀의 푸른색 지갑 속에서 만 원짜리 한 장만 제외하고 모든 돈이 나에게 건네졌다. 나는 돈을 받았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철저한 비즈니스 시스템이다. 물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객들은 나의 동정심 어린 표정보다 이런 사무적 태도를 더 좋아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사정이 급하시니까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저에게 전화를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모든 연락사항은 카페를 통해 해주세요. 비공개이기 때문에 안전하고요, 일이 끝나면 폐쇄됩니다. 약속 장소와 시간, 꼭 지켜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차를 타고 남산순환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그 작은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탱고를 추던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마치 꿈 속의 어느 한 장면처럼 나는 비현실의 세계를 보았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무대로 내려가 보았다.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었다. 계단 앞에는 그 공원 이름이 라틴아메리카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남미순방을 기념해서 전경련에서 만든 것이었다. 남미 각 나라의 국기를 모은 작은 기념탑도 있었다.

나는 한밤중의 텅 빈 공원 무대의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바람이 불며 내 양복 윗 쟈켓을 휘날리게 했다. 공원 주변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호텔 이용객들은 남산이기 때문에 대부분 차를 가지고 다니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가 보았던 탱고 포즈를 취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