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39) 4부. 꽃은, 죽은 나무들의 마지막 폭죽놀이
탱고(39) 4부. 꽃은, 죽은 나무들의 마지막 폭죽놀이
  • 김진국
  • 승인 2011.0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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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를 같이 한 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생각했습니다. 나 같았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걸."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사내자식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책임을 져야지, 이 자식아! 앞장서라. 일단 집에 가서 네 부모 먼저 만나야겠다. 하하하. 오래 전, 우리 어렸을 적 사고 친 뒷이야기입니다. 김충순 그림 2011, 켄트지 210x290㎜, 연필, 수채.

이제 어떡하지? … 라우라도 다다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듯이 말했다. 마치 테이프로 복사해서 다시 돌린 것처럼 두 사람은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말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밥을 먹었고, 배가 불렀으며, 잠을 자지 않고 섹스를 했고, 새벽녘에야 조금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다다와 라우라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해는 따뜻하게 베란다 안으로 발을 뻗어 축축했던 집안의 습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방안의 공기는 뽀송뽀송해졌고 기분좋은 나른함으로 그들은 누워 있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라우라였다. 그녀는 다다를 흔들어 깨웠다. 오후 4시였다. 6시간 정도를 잔 것이다. 라우라는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전 약속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해요"
다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원래는 탱고레슨을 들으려고 생각했는데, 보르헤스 센터에서 하는 수업은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까를로스 가르델역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6시부터 하는 수업이 있었다. 다다는 메모가 된 노트를 보고 그 수업에 간다고 해도 아직 조금 시간이 있기 때문에, 라우라와 같이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떡하죠?"
다다는 라우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셔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랬을 수도 있다. 섹스를 하기 전과 하고난 후의 남녀관계는 분명히 달라져 있는 것이다.
섹스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두 사람이 알몸이 되어 인간의 육체로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까지 서로가 접근하는 것이다. 성기의 삽입은 일종의 브리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다가가는 교량이다. 섹스를,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적인 씨앗 퍼트리기의 일종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구석기 시대의 접근 방식이다. 현대인들의 섹스에는 종족 보존의 본능적 행위는 거세되고 쾌락만 남았다는 식의 접근도 지나치게 말초적인 해석이다.

"저녁에 어디로 갈 거에요?"
라우라가 다시 물었다. 다다는 꼬리헨떼스와 까사요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서 저녁 8시에 만나자고 했다. 라우라가 나간 뒤, 다다는 다시 눈을 붙였다. 피곤했다. 끝없이 잠이 몰려왔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6시가 지나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는 것이, 6시 탱고레슨에도 늦게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탱고레슨도 포기하고 라우라와의 8시 약속에 맞춰 나가려고 하다가, 먼저 샤워를 했다.

욕조에 서서 찬물을 맞으며 그는 지난 밤의 일을 생각해봤다. 현실 속의 일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신은 그 경계선을 타고 가다가 환상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잠깐 기웃거렸는지도 모른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10분 넘게 걸어야 했다. 한 손에 탱고화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다다는 저녁 무렵의 거리를 걸어갔다. 퇴근 시간이어서 거리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숩떼 그린 라인을 타고 오벨리스끄가 있는 니에베 데 훌리오 역으로 가서 레드 라인으로 갈아탔다. 까사요역에 내려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길에 떨어진 신문지 한 장이 하늘로 솟구쳤다. 다다는 눈에 들어간 티끌 때문에 잠깐 걸음을 멈춰 서서 눈을 비비고 있었는데, 그때 눈 높이에 있던 쇼윈도우 안의 텔레비전의 푸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그것은 아무런 일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런 일도 아니고, 길을 걷다가 흔하게 마주치는 텔레비전 화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무엇인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일 때 직감적으로 그것이 눈에 확대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텔레비전의 푸른 모니터가 갑자기 수백배로 확대되면서 다다의 동공 속으로 들어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도시의 빌딩과 거리가 보이고 그 한쪽에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 있었다. 구급차가 서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들것에 실려가는 어떤 사람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다다의 눈에 보인 것은 사람의 형체였다. 흰 천이 사람 형체의 들것 전체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텔레비전 상단 오른쪽에 타원형의 원이 보였고 그 원 안에는 어떤 한 사람의 얼굴이 등장했는데, 다다는 어디선가 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리포터가 현장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화면이 나오는 동안에도 텔레비전 상단 오른쪽의 사람 얼굴은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나타나고 있었다. 쇼윈도우 안쪽이어서 리포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만약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다다가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다다는 타원형 안의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동양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 정확하게, 다다의 마음 속에서는 분명히 한국인인데 누구일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다가 계단을 올라서서 쇼윈도우 앞까지 걸어갔을 때 화면은 바뀌었고 피라냐 낚시대회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본 화면을 생각하며 라우라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걸어갔다. 생각이 날듯 하면서도 정확하게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몸을 기분좋게 감쌌다. 아직 라우라는 오지 않았다. 다다는 창가쪽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탱고화 가방을 놓고 다시 카운터로 가서 아메리카노 커피와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치즈 케이크를 다 먹을 때까지 라우라는 오지 않았다. 다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꼬리헨떼스 대로의 까사요 네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맞은 편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바쁘게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인도 한쪽에 설치된 박스 형태의 꽃집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한 남자가 거리를 걷다가 쇼윈도우 안쪽에 있는 다다를 바라보았다. 다다도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뽀르떼뇨 형상을 하고 있는 40대의 그 남자도 다다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다다는 신음소리를 냈다.

계단 위에서 바라본 쇼윈도우 속의 텔레비전 화면, 그 화면 상단에 있던 얼굴이 누구인지 갑자기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라우라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이었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다는 자신이 본 텔레비전 화면과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면 속의 인물은 박 부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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