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퇴임 앞둔 정의성 인천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 그는'칼'을 닮았다. 칼은 장애인이란 편견에 맞서는 힘이 됐다. 정의성 인천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이 지난 6일 인천고등학교 검도장에서 공인7단의 칼솜씨를 뽐내고 있다./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월미도가 고향인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6살 무렵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그 충격에 언어장애까지 겹쳤다. 남들보다 늦게 학교에 입학한 소년은 친구들의 놀림대상이 됐다. 소년이 선택한 건 정면돌파였다. 소년은 매일 월미도 바다를 향해 가슴 속으로 외쳤다. "나도 말 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훗날 소년은 인천 최초의 웅변학원 원장이 됐다. 대한웅변협회 부총재까지 역임했다. 사고로 잃은 다리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의족을 낀 채 검도를 수련했다. 지금은 검도 공인 7단으로 중·고등학교 사범으로 활동하고 있다. '웅변과 검도'. 어린 나이에 언어와 신체장애를 갖게 된 정의성(66) 인천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이 선택한 삶의 길이다.


▲나는 '정의성'이다.

"제 이름이 정의성입니다. 평생 '정'의롭고 '의'롭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자는 좌우명과 같지요."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를 묻자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며 말을 열었다. 학창시설 언어장애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할 때 홀로 발성연습을 하며 극복한 이야기와, 소나무지팡이를 짚고 통나무를 깎아 만든 의족으로 잘린 다리를 대신한 세월의 아픔이 곁들여졌다.
5개의 웅변학원을 운영하며 인천학원연합회장을 7년간 지낸 이야기, 한 쪽 다리 없는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검도를 수련해 공인 7단의 자격증을 따고 국민생활체육전국검도연합회 실무부회장을 12년간 지낸 이야기가 이어졌다. 또 3번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 인천시장애인체육회 설립과 초대 사무처장을 맡아 일해 온 굵직한 삶의 줄기를 말했다.
모든게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맨주먹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죠. 그래서 더욱 당당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하나 걸릴게 없단 뜻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자유롭다. 제도와 인맥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3번씩이나 국회출마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정치에 뜻은 없다고 한다.
"제가 최근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못 다 이룬 정치의 꿈을 실현하고자 책을 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정치에 뜻을 접기로 아내와 약속했습니다. 남자답게 지킬겁니다."


▲위대한 업적 '전국장애인체전 4위'

인천은 지난 제30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종합 순위 4위를 달성했다. 주최 도시(대전시)에 주어지는 20%의 가산점만 아니었더라면 3위에 오르는 성적이다.
인천시 사상 전국 규모 체육대회에서 4위에 오르기는 처음이다. 쉽게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장애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대회였습니다. 선수와 감독, 그리고 보호자까지 하나된 힘으로 노력한 결과였죠."
당시 인천시 전역에는 종합 4위 수성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 걸렸고, 축제의 주인공인 장애인들의 자긍심을 한없이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인천선수단 총감독으로 대회를 이끈 정의성 처장은 "전년까지 개최지에 10%의 가산점이 부여됐으나 지난 대회부터 갑자기 20%의 가산점이 주어졌다"며 "이 때문에 메달 획득 수에선 앞서면서도 개최지인 대전에 밀려 종합 3위를 아깝게 놓쳤다"고 했다.
특히 인천은 올해 초 열린 장애인동계체전 종합2위를 기록했다. 정 처장의 스포츠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 장애인체육을 위해 뛴 '3년10개월'

인천시장애인체육회는 지난 2007년 100여명의 선수로 출범했다. 출범당시 시장애인체육회에 내려진 예산은 고작 1억원이었다. 1억원으로 직원 인건비와 각종 대회 선수 출전비, 장비 구입비 등을 모두 소화해야 했다.
"1억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죠. 당시 안상수 시장과 황우여 국회의원, 박창규 시의회의장에게 진심어린 호소를 했습니다. 결국 하반기에 7억원의 예산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죠."
시장애인체육회는 정 처장의 노력 끝에 7억원의 예산으로 출범할 수 있었다. 그 후 2008년 14억원, 2009년 18억4천만원, 2010년 21억원으로 예산 규모가 성장했다.
예산과 함께 조직도 커졌다.
선수단이 100여명에서 700여명으로 늘었다. 경기단체도 출범당시 4개 종목에서 현재 34개 종목으로 확충됐다.
"매일 오전 7시면 어김없이 출근했죠. 지난 세월 단 하루도 장애인 체육발전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정 처장이 부임 후 우선 추진한 사항이 경기 종목 확충이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지도자가 필요했다. 특수학급과 유대를 강화하고 지도자 육성에 나선 것이 이때였다.
지금은 전국 최고의 지도자들이 시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체육은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장비와 운동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사회 지도층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 처장은 오는 13일 퇴임한다. 3년10개월간 맡아 온 사무처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일선 현장을 떠나 장애인 교육을 위한 지도자 양성에 남은 생을 매진할 계획입니다. 장애인 지도자는 스포츠는 물론 문화, 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양성될 겁니다. 현재 뜻있는 몇몇 지인들과 이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배인성기자 isb@itimes.co.kr


● 사랑하는 아내와의 약속

제가 웅변학원을 운영할 때 일입니다. 하루는 말썽을 피우는 원생이 있어 혼을 내줬죠. 원생에게 손을 댔는데, 이 녀석이 학원에서 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결국 파출소에 불려갔죠. 그런데 파출소에 달려 온 원생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하더군요. 집안에서도 손을 못 대는 아이를 제가 올바르게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시켜줬습니다. 강직한 성품이 맘에 들었다면서요.
당시 소개받은 여인이 제 아내가 됐죠. 여동생을 소개해 준 처남은 지금 소록도 수녀원장으로 있습니다.
아내를 생각하면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제가 1992년 제14대 국회부터 15대, 16대까지 연속 3번을 출마할 때 아내가 맘 고생을 심하게 했습니다.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아내와 약속한 만큼 이젠 정치에 뜻을 접을 겁니다.


● 정의성 사무처장은 …

-출생: 1944년 8월 인천 동구 만석동
-학력: 인천신흥초교, 대건고교, 건국대 정치외교
학과, 인하대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가족: 아내 김광희, 아들 세명
-현 주소: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좋아하는 음식: 된장찌개
-주량: 소주 반병(정치할 때는 무제한이었다)
-좋아하는 스포츠: 검도, 배구
-좌우명: 정직하게 의롭게 성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