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지금 허리를 삐끗해서 아주 많이 아픕니다. 작업대나 컴퓨터 앞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물감을 사용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아서, 볼펜 하나만으로 그리는데도, 한참씩 쉬어가며 그렸습니다. 뚱뚱한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그리려니 여간 힘 드는 게 아닙니다. 포토샾 작업은 다른 이에게 부탁했습니다. 2011 김충순, 켄트지 290X210mm, 파랑볼펜.


샤워를 하고 나니까 몸이 노곤해졌다. 가르시아가 슈퍼마켓에서 사온 낄메스 맥주 1리터를 마시고 나니까 졸렸다. 맥주를 마시며 다다는 한국에 돌아가 겪었던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가르시아는 인터넷에서 본 한국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가십거리들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다다 역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수준 이상은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가르시아도 인터넷 검색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다다는 지난 3개월동안 부에노스에 어떤 특별한 변화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가르시아도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튜디오를 다니며 탱고를 배우고 집에 와서는 라우라에게서 매일 한 시간씩 개인지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3개월을 추어서 이제는 밀롱가에 다닐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부에노스 밀롱가에는 항상 전세계에서 찾아온 수많은 땅게로스들이 쉴새없이 들어왔다 흔적없이 나간다. 가르시아의 말에 의하면, 최근 눈에 띄는 특징은, 어느 밀롱가에서나 마주쳤던 일본인들 대신 요즘은 중국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을 떠나 가까운 한국이나 중국은 물론, 유럽이나 미국으로 간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아르헨티나에도 오히려 평소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있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의 모습이 줄었다고 했다.

다다가 가장 궁금한 소식은 초이에 관한 것이었다. 이메일을 주고 받기는 했지만, 라우라가 이메일로 뜨겁게 사랑을 고백한 것에 비해서 오히려 초이는 덤덤하게 일상적인 안부만 주고 받았고 그것도 부에노스에 오기 1달 전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다다가 초이에 대해 묻자 가르시아는 기다렸다는듯이 대답했다.

"초이는 지금, 아르헨티나에 없어요"

깜짝 놀란 다다의 얼굴을 보고, 가르시아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몬테비데오에 갔어요. 박부장과 함께"

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르시아가 조금 더 많은 정보를 내놓았다.

"박부장이 다쳤거든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도 했는데, 임기가 아직 1년 넘게 남아서 지금 돌아가면 인사고과에 불리하게 작용한데요. 파견기간 다 채울 때까지 여기서 치료하기로 했나봐요"

"어디가 아픈데?"

"병이 난 것은 아니고, 박부장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뺑소니차에 당했는데, 하마트면 위험할 뻔했지요.
비오는 날, 초이와 함께 꼬르도바 거리에 있는 와인바 근처에 주차를 했는데, 길을 먼저 건넌 초이가 차에 가방을 놓고 왔다면서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었어요. 간발의 차이로, 다리가 부딪치는 데서 끝났지 그렇지 않았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거에요."

"범인은 못잡은 거야?"

"어두운 곳이었고 밤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번호판도 확인할 수 없었데요. 뽀르떼뇨들이 운전을 험하게 하잖아요. 다친 사람만 억울한거죠. 박부장은 다리뼈에 금이 가서 세 달 정도는 치료해야 한데요. 원래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데, 박부장은 불편하다고 입원하지 않고 통원치료 받고 있어요. 차로 출근하고, 웬만하면 걷지 않고 회사에 앉아 있다가 곧바로 저녁에 퇴근한데요. 그래서 요즘 초이가 밀롱가에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해요. 박부장 간호한다고."

가르시아는 마치 자신이 바로 옆에서 교통사고를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다는 가르시아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뽀르 우나 까베사"

"예?"

다다는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왔던 탱고 음악 '뽀르 우나 까베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퇴역군인 알 파치노가 자살여행을 떠났다가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하던 도중 낯선 여인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한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알 파치노는 음악에 맞춰 멋진 탱고를 보여주는데, 그때 흘러나온 음악이 '뽀르 우나 까베사'였다.

노래 제목의 뜻은, '말 머리 하나 차이로', 즉 우리 식으로 의역하면 '간발의 차이로'라는 뜻이다. 경마에서 많은 돈을 걸었던 남자가, 자신이 응원하던 말이 결승점까지 1등으로 들어오다가 다른 말에게 머리 하나 차이로 져버린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사랑에 비유하고 있다.


머리 하나 차이로 져 버렸네/ 그 잘난 말은 쭉 뻗고 있다가 그만 늘어뜨렸지/ 그놈은 돌아오면서 말하는 것 같았어/ 잊지 말게나, 형제여/ 알다시피 자넨 돈 걸지 말았어야 했어// 머리 하나 차이로 져 버렸네/ 경박하고 발랄한 여자의 즉흥적이고 거친 사랑에서/ 그 여자는 미소지으며 사랑을 맹세했지/ 내 옆에 누워서/ 내 사랑을 죄다 활활 불태우면서


다다는 도박의 도시,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의 카지노 딜러 앞에 앉아 있는 박부장과 초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들은 지금 간발의 차이로, 거액을 날리고 한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잭팟이 터져 샴페인잔을 높이 들고 환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무장의 무릎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초이가 앉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어쨌든 초이는 박부장 곁에 있는 것이다.

"조금 쉬고 계실래요? 누나가 일 끝나면 전화한다고 했는데, 3, 4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쉬시는게 낫겠어요"

라우라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다다는 부담이 됐다. 비행기 안에서도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라우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할 것인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녀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다다는 자신의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고백을 받고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라우라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인다면, 초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가르시아는 3시간 후인 저녁 7시에 다다를 데리러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다다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탱고 음악이 들렸다. 라디오나 TV의 탱고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것인 것 같았다. 떠들썩한 방청객들의 소리와 함께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이어지고 이어서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까를로스 디 사르리의 음악이었다. 아아,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