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32) 4부. 꽃은, 죽은 나무들의 마지막 폭죽놀이
탱고(32) 4부. 꽃은, 죽은 나무들의 마지막 폭죽놀이
  • 김진국
  • 승인 2011.0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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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꽃 사태 난 것처럼 떠들어 대더니만, 비가 내립니다. 이젠 좀 차분 해지려나. 꽃이 지고 조용해지면, 함께 작업하는 다 늙은 녀석과 남해를 보러 갈 겁니다. 혹시 통영에 가보셨나요? 통영은 저도 처음인데, 이 나들이를 기다리며 왜 이리 설레는지. 학생 때 정말 수학여행 떠나던 기분하고 똑같습니다. 2011 김충순, 210 X 290 mm 켄트지, 볼펜, 수채물감 그리고 포토샆으로 옮겨 마우스로 정리했습니다.


창밖으로 푸른 색의 초원, 팜파가 펼쳐지더니 에세이사 국제 공항의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4개월전 처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공항에 도착할 때와는 팜파의 색깔이 달랐다. 그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막 접어들던 시기였고 지금은 한 겨울이다. 팜파의 푸른 색은 황금빛 혹은 어두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곧 봄이 올 것이다. 저 어두운 갈색은 다시 푸른 색으로 뒤덮일 것이다.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동체가 덜컹거린다. 매끄러운 솜씨는 아니다.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출발해서 칠레의 산티아고 공항을 거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공항까지 도착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다. 캐나다인들, 아르헨티나인들, 칠레인들 이외에도 토론토를 경유해서 아르헨티나로 오는 아시아계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중국인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두 사람 정도만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같은 아시아계라도 중국인과 일본인 한국인의 구별이 비교적 쉬웠으나 인터넷이 일반화되고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문화의 차이가 줄어들자 각 나라의 특색들이 많이 사라져서 외모만으로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또는 한국인지 구별하는게 갈수록 어려워졌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멈추고 게이트까지 서서히 이동하는 시간이 지나자 좌석벨트의 불이 꺼지며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다다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좌석이 비행기 거의 끝 부분이었기 때문에 앞 좌석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가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대부분 긴 팔에 점퍼나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아르헨티나인들이다.
한국은 지금 여름이지만 이곳은 겨울이다. 겨울이라고 해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겨울은 춥지가 않다. 물론 눈도 내리지 않는다. 2007년 8월에는 아주 특별하게 영하 5도까지 기온이 떨어졌고 눈도 내렸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겨울 평균 기온은 13도에서 15도 사이다. 긴 팔 티셔츠에 점퍼를 걸치면 지내기 딱 좋은 날씨다.
탱고 음악의 아버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 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라는 곡이 있다. 비발디의 <사계>에 견줄만한 곡이다. 그 곡을 다다는 아이폰에 저장해 두었다. 지금 그의 귀에 흘러나오는 곡은 그중에서 <겨울>이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머리 위 캐비넷에 넣어두었던 짐을 꺼내며 소란스라웠지만, 다다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세 달 만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날 때는 서울에 가서 최피디를 만나 촬영했던 방송 테이프의 녹음만 하고 곧바로 다시 올 생각이었다. 스튜디오 일도 밀린게 있었지만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까 처리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튜디오 일도 다다가 아르헨티나에 있는 동안 후배가 성실하게 맡아 주었지만 그래도 주인이 직접 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다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세 달동안, 충무로에 있는 탱고 스튜디오, 아트탱고 센터를 찾아가서 탱고를 배웠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저녁 스튜디오에 나가서 하루에 3시간 이상씩 탱고를 배웠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새벽까지 진행되는 밀롱가에서 춤을 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탱고 스튜디오에서 배우는 것보다 오히려 더 편했다. 가르치는 수준도 좋았고, 무엇보다 스페인어가 아닌 한국말로 강습을 들으니 훨씬 편안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 세 달동안 다다의 탱고 실력은 빠르게 향상되었다. 이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밀롱가에서도 두렵지 않게 춤 신청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있게 플로어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탱고를 배우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1년정도는 지나야 플로어에서 걸음마 할 수준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1주일에 한두번 춤을 출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었고, 또 사람마다 다르다. 다다는 부에노스에서 처음 탱고를 배운 후 지난 4달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탱고를 추었다. 다른 사람이 1, 2년에 걸쳐서 배울 수준을 지난 4개월동안 배웠다.

다다가 서울에 있는동안 초이와 라우라, 가르시아와는 메일로 연락을 했다. 간단한 안부 메일이 오고 갔다. 3달동안 가장 많은 메일을 보낸 사람은, 초이가 아니라 라우라였다. 의외였던 것은 라우라의 메일 내용이었다. 라우라는 두 번째 메일에서 다다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직접 만날 때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던 그녀였는데, 메일을 보낼 때는 진솔한 감정을 수다스러울 정도로 장황하게 표현했다. 아마 라우라를 직접 만났다면, 그녀는 역시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을 것이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말보다는 글에, 더욱 편안함을 느끼고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라우라가 그랬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통로가 비교적 한산하자 다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트렁크는 화물로 부쳤고 기내에 가지고 탄 것은 작은 기내가방과 여권 지갑이 들어있는 숄더백이었다. 선반에서 기내가방을 꺼내 맨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수화물 찾는 곳에서 그는 커다란 빨간색 가방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출구 게이트를 나서자, 곧바로 정면에 가르시아가 보였다.
세 달만이었지만, 다다의 마음은 착잡했다. 세 달 전에는 낯선 땅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는 적어도 1년은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고 온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비자없이 최대 체류기간이 6개월이다.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6개월이 되기 전에 이과수 폭포에 가서 브라질 국경을 한 번 넘어갔다 오거나 도박장이 즐비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혹은 브라질의 리오 축제를 구경하러 건너갔다 와야 한다.
공항에는 라우라가 나올줄 알았는데, 가르시아의 설명으로는 그녀는 한국에서 온 방송사의 현지 안내를 맡아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이가 보이지 않는게 조금 섭섭했다. 가르시아는 다다가 내미는 쪽지를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 쪽지에는 다다가 1년동안 살 바리오 노르떼에 있는 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BYT라는 아르헨티나 최대의 숙박 알선 사이트에서 고른 집이었다. 비교적 조용하고 안전한 동네에 있는 싱글 스튜디오였다. 그렇지만 한 달 렌트비가 1백만원 가까이 되었다.
여기서는 집을 사는 것은 서울보다 싼데 월세는 훨씬 비쌌다. 한 달 생활비가, 집세 포함해서 최소한 250만원은 있어야 한다. 음식은 주로 집 근처에 있는 까르푸에서 장을 봐서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강습료, 밀롱가를 다니면서 필요한 돈과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의 택시비까지 계산한 생활비였다.
BYT 관계자와는 낮 1시에서 2시 사이에 도착한다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바리오 노르떼는 조용한 곳이었다. 프렌치 스트리트와 아우스트리아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아파트가 있었다. 동네 이름처럼 유럽풍의 아파트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입구에서 인터폰을 하자 문이 열렸다. BYT 직원과 간단한 수속을 하고 현금으로 3개월치 월세를 선불로 지불했다. 달러만을 받는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미리 3개월치 월세를 환전해 놓았다. 생활비는 시티 은행 카드를 이용해서 아르헨티나 페소를 뽑아 쓸 생각이었다. 그것이 수수료가 가장 적게 먹히는 방법이다. 모두 3개월 전에 한 달동안 이곳에 체류하면서 익힌 노하우들이었다.
BYT 직원은 돌아가면서 집 열쇠 두 셋트를 주었다. 혼자 살 거니까 사실 열쇠가 두 개나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파트 방문 열쇠는 두 개였다. 잠금장치가 두 개나 되었다. 그리고 1층 현관을 나갈 때, 들어올 때 모두 열쇠를 이용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가르시아와 두 사람만이 방에 남았다. 냉장고는 물론 텅 비어 있다.
"피곤하죠? 샤워 좀 하고 있을래요? 그동안 내가 나가서 맥주라도 사올께"
가르시아가 맥주를 사러 가는 동안, 다다는 가방을 열고 짐을 풀었다. 옷을 꺼내 채곡채곡 옷장에 걸고, 샤워를 하고 나니까 몸이 풀렸다. 인천공항을 떠난지 30시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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