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101번째 作'달빛 길어올리기'첫 디지털 촬영 시도 … 영화 속 실제다큐 담아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황금곰상, 두바이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 청룡영화상 감독상, 칸영화제 감독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등 50여 년 동안 메가폰을 잡아 온 그의 경력은 더 없이 화려하다.

특히 2007년 영화 '천년학'으로 100작품 연출이란 숫자를 채우기까지 그는 주로 우리 문화의 흥·정서·아름다움을 스크린에 담아내며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번 영화 역시 한국고유의 종이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 우리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하지만 스스로 '100, 그리고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하며 신인감독의 마음가짐으로 기존작품들과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바람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일단 주제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각이 행위자에서 주변인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동안 번뇌에 휩싸인 승려(만다라)·소리꾼 송화(서편제)·조선시대 천재화가(취화선) 등 작품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었던 반면, 이번 영화에선 시청 한스타일과에 근무하는 평범한 공무원 필용(박중훈)이 극을 이끌어 간다.

한지에 '한'자도 몰랐던 그는 우연히 조선왕조실록을 전통한지로 복본하는 시청추진사업에 뛰어들면서 한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닫게 된다.

관객은 필용과 함께 한지가 만들어지는 방법부터 특징, 우수성을 전문가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한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지원(강수연)은 이런 한지의 깊은 세계를 보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는 한지로 만드는 공예품, 즉 지공예품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 렌즈로 바라본 찻잔, 수납장, 요강 등 다양한 작품들의 숨 막히듯 아름다운 자태는 다시 스크린에 투영돼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꽤 자주 등장하는 한지에 대한 실제 다큐멘터리는 극의 전체 흐름과 조화롭게 융화되며 사실성을 한층 강화하는 효과를 준다.

필용의 아내이자 지공예가인 효경(예지원)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실제 전주시청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고, 주인공들이 시종일관 한지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만큼 영화는 자칫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효경은 나머지 두 사람과의 적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다큐와 극적 요소를 조율한다.

이 작품은 임 감독이 처음으로 디지털 촬영 방식을 시도한 영화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장면 연출이 가능한 디지털 촬영 방식은 그의 영상미학과 결합돼 더욱 아름다운 장면을 선사한다. 전통한지작업 재현을 위해 한 겨울에 계곡에서 물속 촬영을 강행한 마지막 장면은 시린 듯 따뜻하게 밤을 비추는 달빛과 호쾌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화면 가득 넘치며 강한 여운을 준다.

거장의 특별한 작품을 위해 한국 영화계 전체가 나서기도 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김영빈 부천국제영화제·민병록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단역으로 출연하며 힘을 실어줬다.

한국 영화산업의 대표적인 3개 회사 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CJ엔터테인먼트도 각각 투자·배급·마케팅을 담당하며 영화제작에 함께 참여, 거장에 대한 예우와 존경을 표현했다. 17일 개봉. 118분. 15세 이상

/심영주기자 yjshim@itimes.co.kr

 

   
▲ 임권택 감독


"1천년 세월 견디는 '한지' 민족 끈기 상징하는 유산"

임권택 감독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이런 정보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후 4년 만에 '달빛 길어올리기'로 돌아온 임권택 감독은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제작 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지천년, 견오백이란 말이 있습니다. 종이는 1천 년, 비단은 500년을 간다는 말이지요. 천년 세월을 견디는 한지는 우리민족의 끈기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입니다."

3년 전 그는 전주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 추진으로 한지와 처음 만났다.

사업 추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영화화를 궁리하며 자료조사를 하던 그는 여러 권의 고문서들을 접했다.

50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방금 만든 것 같은 종이의 질감에 감탄한 그는 앞으로의 500년, 1천년을 위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한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자료조사, 시나리오, 제작까지 각각 1년이 걸려 꼬박 3년 동안 한지를 품고 산 그는 알면 알수록 깊고 넓은 한지의 세계에 놀랐다.

"1년 이상 취재를 했지만 촬영기간 내내, 심지어 막바지 촬영시기에도 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새로운 정보가 흘러들어 왔습니다. 한지의 광활한 세계를 다 담아낼 수도 없으면서 덜컥 작품을 만들겠다고 한 게 아닌가, 내가 경솔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나 한지의 일부분이나마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도에서였을까. 영화는 출연배우 강수연이 다큐멘터리냐고 물었을 만큼 드라마틱한 극적장치를 최대한 배제시켰다.

한지에 더 집중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지였다.

그의 생각은 극 중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한지를 예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반론을 제기하며 관객이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을 대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철저하게 고증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의 의미는 '한지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현재 세계 속에서 한지의 입지는 어떤가?' 하고 자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한지(장판)위에서 태어나 한지(염습)에 싸여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한지는 더 이상 종이가 아닌 문화인 것이지요. 한국 사람만이 만들 수 있으면서도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 그 보람을 위해 다시 데뷔한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심영주기자 yjshim@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