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죽산을 민족주의자로 만든 강화 만세운동


기독교 감리교계 인사 주축
한달여간 조직적 만세 시위
조봉암 등 8명 비밀리 결사
민중봉기 소식 곳곳에 알려


강화에서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 계획은 기독교 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 등은 모두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유봉진은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출신으로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할 목적으로 이토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채용이 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힐 만큼 애국지사였다.
 

   
▲ 강화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청년회가 생겨났다. 죽산도 청년회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키웠을 것이다./사진제공=인천강화 기독교역사연구회


그는 1919년 3월5일 서울의 시위운동에 참여한 뒤 귀향한 선두교회 교인 황도문으로부터 서울의 시위소식과 독립선언 등의 문서를 접하자 강화에서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 뒤 교인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았다.

드디어 3월18일 오후 2시 강화읍 장터에서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된 장터는 그 사이에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가 있어 유봉진의 결사대원들은 돌다리 부근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양쪽 시장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유봉진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길상면 온수리에서 백마를 타고 장터에 나타나 시위대의 조직적인 행동을 위해 종루에 올라 큰 종을 쳐서 군중을 모았다.

장터를 가득 메운 시위군중은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했고 진압을 위해 출동한 강화경찰서 순사들에게도 만세부르기를 시키기까지 했다. 이봉종 강화군수도 유봉진의 지시로 만세를 불렀다.

당시 장터에 모인 사람은 5천~6천명, 시장에 가득한 총인원은 1만명에 이른다. 1932년 강화의 전체 인구가 7만2천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섬 사람들 빼고는 대부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봐야 할 정도로 강화의 만세운동은 대단했다.
 

   
▲ 2011년 제92회 삼일절을 맞아 신동근(오른쪽) 인천시 정무부시장 등이 1919년 강화에서 근 한달간 계속된 강화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제공=강화군


만세운동의 결사대장 유봉진은 만세운동 이후 고려산에 몸을 숨겼다가 장봉도를 거쳐 마니산에서 숨어 지내다 경찰이 자신의 부모를 붙잡아가 고문하자 자진출두했다.

강화의 만세운동은 한두 번에 끝난 것이 아니다.

3월18일 강화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21~24일 교동 읍내리에서 3월27일 온수리에서 계속됐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4월부터는 봉화시위로 이어졌다. 1일 송해, 하점, 양사면에서 피워 올려진 봉화는 7일 석모리에서, 8일 강화 9곳에서 계속 됐고 11일 길정리 만세시위와 13일 두운리 만세시위로 이어지다 22일 솔정리에서의 봉화시위로 끝을 맺는다.

근 한 달간 강화 곳곳에서 계속된 것이다.
 

   
 


이처럼 강화 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전 지역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조봉암을 비롯한 8인의 활약이 컸다.

일제는 이에 대해 '공범 8인조' 혹은 '예수교도 8인조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한상운이 지은 '대한민국 최초의 부흥회일기'에 따르면 체포 당시 조봉암은 21세, 대서업보조, 주소는 강화읍 신문리 550번지로 돼 있다.

이에 대해 강화군지에서는 강화의 만세운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성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는 나이 어린 학생 몇몇과 강화읍내의 젊은 청년들 8명이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들은 조봉암 등 8명으로 일제는 '공범 8인조'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봉암 등은 밤마다 벽모문을 써서 서울 등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 소식을 강화민들에게 알리며 민족자각에 앞장섰고 경고문, 팸플릿 등을 돌려 동지를 모으면서 거사를 계획하다가 4월20일 검거됐다. 이때 고제몽, 조구원, 오영섭 등 3명의 학생은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및 소요죄로 그해 9월30일에 서울서 열린 공판에서 6개월 징역을 구형받았다가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에 대해 죽산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이렇게 밝혔다.

"3·1운동때 젊은 동지 12명과 더불어 1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우리 강화에서는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했다. 유 선생은 5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1년 살았다."

이 당시 만세운동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98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43명이 1919년 10월4일 예심에 회부됐고 몇은 면소판결을 받았다. 이후 33명은 그해 12월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았다. 유봉진은 죽산의 기억과는 달리 징역 3년을 살았다.

살펴보면 자료 어디에도 조봉암이 징역 또는 태형을 받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사실과 함경남도 출신 독립운동가 이가순에 대한 추억이 죽산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아마도 예심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는 조봉암 등 5명은 증거가 불충분해 무죄판결됐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죽산이 믿고 따랐던 유봉진은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진위대에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 때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전했다.

3·1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른 유봉진은 1921년쯤 부천군 북도면(현재 옹진군 북도면)에 사립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했다가 3년 후 다시 길상면 온수리로 옮겨 사립 니산학원(尼山學院)의 복구에 힘썼다. 이후 감리교 전도사로 강화군 작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43년 신사참배와 징병제 실시 등에 반대해 사직한 애국지사였다.

감리교 교회에서 생활하던 스무살 청년 죽산은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일제의 침탈과 폐해를 뼈저리게 실감했고 민족의 운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독립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죽산은 1957년 5월 발간된 잡지 '신태양'의 별책 '나의 정치백서'라는 글에서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고 밝혔다.

3·1운동의 참가와 1년간의 투옥생활은 2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 조봉암에게는 일생의 행로를 뒤바꾸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3·1운동을 겪으며 죽산은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된다.

죽산의 말을 들어 보자.

"3·1운동이 일어나 그 운동에 선두에 섰다가 난생처음 감옥살이를 해보았습니다. 감옥에 가서 비로서 민족혼을 찾았다할까 민족이 귀한 것도 알았고 나라가 중한 것도 알게되고 먹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만 살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싸우고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 일을 위해서는 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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