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도리 내 도리

인천지방법원 판사 최수진

 

   
 

필자는 인천지방법원 소액재판부에서 일하는데 소액재판 사건은 쟁점이 비교적 단순한 반면 그 수가 다른 분야 재판부보다 월등히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합의부나 민사단독 사건보다 비교적 세련되지 못한 당사자들의 주장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여기서 판사들은 화해·조정을 통한 분쟁 해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법원까지 올 때에는 이미 분쟁이 법적 다툼을 넘어 서로를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아 좀처럼 화해·조정을 통한 분쟁 해결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필자는 그럴 때 당사자들에게 '네 도리 내 도리'라는 옛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화해·조정으로 이끈 경우가 적지 않다.

황희 정승이 어느 비 오는 날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오고 있는데 마침 맞은 편에서 아들 친구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옛날 양반 법도에는 어른을 길에서 만나더라도 큰절을 올려야 되는 것이었나본데 아들 친구는 말에서 내려 큰절을 하긴 해야겠는데 땅이 젖었으니 번거롭기도 하고 옷도 젖을 것 같아 망설였고 이를 눈치 챈 황희 정승이 '비도 오니 그냥 말 위에서 인사하라'고 하자 아들 친구는 얼른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라며 말 위에서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런데 황희 정승은 집에 와서 아들에게 '오늘 길에서 네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도 안하더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예의바른 자기 친구가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고 친구를 찾아가 실제 그랬는지 물었다. 아들 친구는 무슨 소리냐, 황희 정승이 그냥 말 위에서 인사해도 된다 해서 그런 것이라며 펄쩍 뛰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집에 돌아와 황희 정승에게 '아버지께서 그냥 말 위에서 인사를 하라고 하셔서 그리 했다는데 왜 인사도 안했다고 하십니까?'라고 따져 물었고 이에 황희 정승은 '말에서 내려 젖은 땅에서 큰절을 하면 힘들테니 그냥 말 위에서 인사하라고 한 건 친구 아버지 된 내 도리이고 친구 아버지가 그러라고 해도 말에서 내려 큰절을 하는 것은 네 친구의 도리'라고 했다.

황희 정승이 이 이야기에서 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 도리는 다하지 않고 자기에게 편한 것만 챙기려 한다는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쟁은 서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데서 주로 생기고 이는 주로 상대방의 도리만 따지고 상대방이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도리부터 챙기고 '내 탓이오'라고 한다면 분쟁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필자는 오늘도 욕심보다는 자신의 도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당사자로서 만나는 행운(?)을 기대하면서 화해·조정 재판에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