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크 칼럼 ▧


 

   
 

'고려대장경' 1천 주년의 태양이 솟아 올랐다.

1011년, 고려는 처음 나무판에 한자 한자, 글씨를 새겼다. 돋움글자로 새겨진 것은 부처님 말씀이었다. 고려인들은 불교경전을 판각하며 오랑캐를 물리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고려인들에게 대장경은 곧 부처님이었다. 거짓말처럼, '초조대장경'이 완성되자 거란족은 물러갔다.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거란이 퇴각하자 몽고가 쳐들어왔다. 고려를 침략한 몽고는 1232년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운다. 같은 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는 4년 뒤, 다시 대장경을 파기 시작한다. 그렇게 16년 만인 1251년 완성된 것이 바로 지금 해인사가 보관 중인 '고려팔만대장경'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어낸 곳은 인천 강화였다. 강화엔 '대장도감'이란 기구가 있었다. 대장도감은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을 두고 대장경 판각을 총 지휘했다.

대장경이 완성된 뒤 강화 '선원사'는 이를 150년간 보관한다. 1398년 팔만대장경을 지금의 해인사로 옮긴 것은 왜구 등의 침탈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바닥에서부터 눕혀 차곡차곡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고, 한문을 아는 사람이 30년간 읽어야 통독할 수 있는 '세계적 유산'이 인천 강화에서 태동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인 단군왕검은 4343년 전,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제단을 세웠다. '참성단'이다. 민족의 시조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쌓을 정도로 강화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신성한 땅이었으며, 민족의 성지(聖地)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 강화는 비옥한 자원을 품고 있기도 하다. 강화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 풍부한 어장을 형성한다. 강화에서 한 해 생산하는 쌀은 강화군민들이 20년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다.

강화는 우리나라 중부를 관통하는 한강의 관문이기도 하다. 고려, 조선 왕조의 피난처 역할을 한 것은 이런 천연요새적 특성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침입을 온 몸으로 맞아야 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강화는 민족의 성지란 자긍심과 책임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멀게는 13세기 몽고로부터 40년간 고려왕조를 지켜냈고, 19세기엔 미국, 프랑스와 같은 제국주의에 피로 맞서 싸웠다. 이런 저항정신은 혹시 대장경을 판각했던 '집단기억'에서부터 싹튼 것은 아닐까.

대장경은 해인사로 갔지만, 강화에선 여전히 대장경이 살아 숨쉰다. 강화 서문밖, 선원사, 충렬사, 강화갯벌, 강화역사박물관…, 강화 곳곳에선 지금도 대장경의 숨결이 염하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대장경은 곧 강화도의 정신이자 인천의 두드러진 정체성 가운데 하나다. 어떤 사람은 인천에 정체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체성이 너무 많아 하나로 응집해내기가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합천군과 경상남도는 지금 대장경 행사준비로 시끌벅적하다. 지난해 10월 '고려대장경 간행 천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을 대규모로 연 합천과 경남은 오는 9월~11월 '대장경문화축전'을 펼친다. 45일간 계속되는 대장경문화축전은 전시·학술·공연·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천년의 지혜를 천년의 미래로'란 슬로건을 내 건 이번 행사를 위해 대장경 천년관, 지식문명관, 정신문화관과 같은 건축물도 지어진다. 합천과 경남은 올해 대장경을 통한 도시브랜드를 전세계에 각인시키겠다는 다짐이다.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동안 군민·도민이 한 줄기 물결이 돼 또하나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만들어낼 것이다. 1천년전, 고려인들이 대장경 판각으로 하나가 됐듯이….

'외규장각 도서'나 '신라의 금관'은 프랑스·일본에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정신이다. 팔만대장경은 합천에 있지만 강화와 인천의 영혼이 깃들여진 유산임에 틀림없다. 2013년 정명 600년,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를 앞둔 인천. '세계적 도시로의 비상'을 꿈꾸는 인천이 그 첫 도약을 '2011년 대장경 밀레니엄' 사업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김진국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