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이애란 교수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반도 긴장이 팽팽하다. 이런 와중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통일부는 "국내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이 15일 현재 2만50명을 기록했다"고 최근 밝혔다. 지금은 2만명이지만 탈북자는 앞으로 4만명, 8만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경제난,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능력 저하 등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이 점점 궁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싫어서 남으로 온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애란(47) 경인여대 교수는 탈북자로서 최초로 남한에서 박사학위(식품영양학)를 받고 교수가 된 인물이다.

 

   
▲ 경인여대 교정에서 만난 이애란 교수는"북한이탈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남한사회에서의 소통"이라며"단계별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검은색 정장차림에 금빛 머플러. 굵은 퍼머넌트 웨이브를 한 외양에서 지성과 세련미가 흘러나왔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가을햇살에 부서져 잔디밭에 흩뿌려졌다.
"안녕하세요, 사진 잘 나오면 보내주셔야 해요."
이 교수는 인터뷰 동안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에게 포즈를 취하며 여유있게 말을 건넸다. 사진을 찍거나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계속해서 울려댔다. 끊임없이 스케줄을 조정하며 바쁜 모습이었다. 몇 차례의 전화통화가 끝난 뒤 "언제 교수가 됐느냐"고 물었다.
"올 초에 부임했어요. 신문에 공고가 났길래 한번 응시한건데 운 좋게 합격을 했어요. 아는 분들에게 부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괜히 부탁했는데 잘못되면 서로 '뻘쭘'하잖아요. 하하하."
그는 남한 속어인 '뻘쭘하다'(민망·어색하다)는 말을 썼다. 13년 전 정착했기 때문일까. 이 교수는 남한언어의 뉘앙스를 완전히 체득한 듯 했다.
"제가 전공한 과목은 식품영양학입니다. 북한에서 대학 다닐 때도 식품영양학을 공부했거든요. '웰빙시대'에 이보다 더 좋은 학문이 어디 있겠어요."
이 교수가 이화여대에서 지난해 식품영양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것은, 북한 신의주경공업대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대학전공을 안 남한의 한 지인은 그에게 이화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것을 조언했고, 그는 생업도 접은 채 학업에만 전념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서울에서 건강음식전문점을 하고 있었어요. 학위를 따려면 영어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배워서 영어는 생소했거든요. 영어시험 통과해야죠, 논문 써야죠, 도무지 식당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석사 때 식당을 정리하고 영어학원을 다녔어요."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작은 식당을 처분했다. 이후 먹고 사는 문제는 작은 연구소 취업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월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어렵게 공부를 마쳤고, 마침내 올해 교수가 됐다. 이 교수가 부모, 형제의 가족, 4개월 된 아들을 포함해 모두 9명이 북한을 탈출한 것은 지난 1997년.
"96년에 결혼을 해서 양강도 해산시에서 살고 있었지요. 미국에 살고 계시던 친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찾고 있었던 데다, 출신성분이 안 좋은 우리 가족은 매일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결국 쥐약 한 봉지씩을 주머니에 넣고 탈출길에 나서게 됐습니다."
가족 모두가 추방당해 살 때, 북한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춥고 배고프고 졸리운 시간의 나날이었다.
"학교는 다녔는데 봄에는 고사리 뜯고 가을에는 약초를 캐야 했어요. 6시간을 걸어서 오가며 정부에 바칠 할당량을 채우느라 온종일 산 속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지요."
천신만고 끝에 시작한 남한생활 역시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남한사람들이 말하기를 공기업에 들어가면 좋다고 해서 취직을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공기업에서 누가 북한이탈주민을 써주겠어요?"
호텔 룸메이드, 보험회사를 전전하던 그는 남한으로 온지 4년 째인 2000년 그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남한에서는 일하면 밥은 안 굶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은 신의 영역으로 보였어요."
이 교수는 그 때부터 물질에 마음을 비우고 '꿈'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공부였고 아직은 갈 길이 남았지만, 마침내 작은 꿈을 이뤘다.
그의 경우는 그러나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성공사례에 불과하다. 그와는 달리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생활에 적응을 못한 채 '남한 속 또 하나의 북한사회'에서 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 안된다는 점이다.
"제가 미국에도 몇 번 갔었는데 미국사람들이 그럽니다. 너희는 말도 같은데 뭐가 어렵냐고.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북한이탈주민들과 남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뉘앙스나 말의 저변에 깔린 의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말을 이해 못하는데 일의 능률이 오를 수 있나요?"
이 교수는 "소통이 잘 돼야 팀워크가 좋아지고, 그래야 일의 효율성도 커진다"며 "무엇보다 말의 맥락이 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한다.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에 정착하게 하기 위해선 일을 시켜야 합니다. 그 속에서 문화를 깨닫고 언어를 소통하는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는 대안학교 설립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정책보다는 사람의 특성에 맞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 형 직업훈련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현재 남한사회에 동화하지 못한 채 '자기들만의 섬'에 갖혀 살고 있다는 게 이 교수의 말이다.
"앞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 그들에게 빵을 주기보다는 남한 실정과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게 북한이탈주민의 급격한 유입과 통일을 대비한 최선의 정책이라고 봅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이애란 교수는 …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나 11살 때 부모, 세 명의 동생과 함께 평양에서 삼수갑산으로 쫓겨났다. 당시 북한정부는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는데 그의 집안이 지주출신인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여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1·4후퇴 때 월남한 사실까지 밝혀지자 문화예술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직책을 빼앗기고 가족 모두가 깊은 산속으로 추방된다.
추방지에서 관동국민학교와 관동고등중학교를 다니던 중 19살 되던 해 가족 모두가 건설사업에 동원돼 양강도 해산시로 나온다. 이후 그는 신의주경공업대 식품공학과에 들어갔으며 의사인 남편을 만나 96년 결혼한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이 교수는 97년 부모, 형제, 아들과 함께 북한을 탈출, 남한에 정착한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학업에 뜻을 품고 이화여대에 진학해 200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인여대 식품영양조리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는 한편, 서울에서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