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


 

   
▲ '일구이무(一球二無)'. 그에겐 야구공도, 인생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단 한 번의 기회일 뿐이다. 승부사 김성근 감독이 사인구를 들어보이고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개항지 인천에서 인천영어야학회에 다니던 일본인 학생이 1899년 2월 3일자 일기에 '학우들과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하였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 일기가 한국에서 야구를 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110년이 넘는 한국 야구 역사의 중심에 구도 인천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천 야구팬들은 씻기 힘든 상처를 안고 있다. 프로야구 출범 후 '삼미'에서 '청보', '태평양'으로 이어진 연고팀이 만년 꼴찌란 불명예를 안았다. 그나마 인천에 야구 자존심을 찾아준 '현대'는 서울입성이란 핑계로 손바닥 뒤집듯 인천야구를 등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야구팬들이 연고팀에 등을 돌린 건 어찌 보면당연했다. 2000년 해체된 쌍방울 선수들을 영입해 새롭게 창단한 SK와이번스에도 팬들의 외면은 계속됐다. 적어도 4년 전 '야신' 김성근(68)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진 말이다.


▲SK가 인천이고, 인천이 SK다.

2007년, SK와이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인천 야구팬들의 반응을 차가웠다.
"당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SK는 인천이 아니다. 우승했지만 정이 안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 이래선 안 되겠다. 인천팬을 위한 무언가를 해야겠다 싶었죠."
팬들의 외면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야신 김성근의 판단은 정면 돌파였다. 오로지 실력으로 팬들을 다시 끌어 모을 수밖엔 없었다.
"다음해 한국시리즈에서 또 우승을 하니까 분위기가 달라지더라구요. 첫 우승 때하곤 달랐죠. 팬들과 한데 엉켜 기뻐했습니다."
2008년 우승은 구도 인천의 자존심을 살리는 불씨가 됐다. 떠났던 팬들도 하나 둘 모였다. 김성근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 렀을 땐 팬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그때 받은 팬 사랑이 결국 올해 우승의 원동력이 됐다.
"이제는 완전히 인천은 SK가 됐죠. SK도 인천이 됐고요. 야구를 통해 인천의 지명도도 높아졌고, 인천 덕에 SK도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SK와 인천은 함께 성장했다. 2010년 인천은 SK가 있어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다.
"부임 첫날 선수들에게 '문학구장 가득 팬들로 채우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속마음을 가능할까 싶었어요. 이젠 쓸데없는 생각이었구나 합니다.(웃음)"
지난 시즌 인천은 약 100만명에 달하는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시즌 만원사례도 10여 차례나 됐다.


▲SK는 약하다. 그래서 우승할 수 있다.

 

   
 

"SK는 항상 정상에서 싸워요. 그래서 여유가 없어요. 조금만 방심해도 바로 추락합니다."
SK에 대한 야신의 평가는 냉담하다.
막강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팀이 바로 SK라고 꼬집는다. 선수층도 얇아 부상이라도 당하면 팀 전력이 휘청인다. 올해도 채병용의 군 입대와 시즌 초반 김광현의 부상으로 막막했었다. 내년엔 더욱 난감하다. 그렇다고 우수 선수 영입을 통한 전력보강은 생각치도 않는다.
"SK는 약합니다. 절대 우승할 수 있는 팀이 아니죠. 그래도 우린 우승해야 합니다. 남은 7개 프로구단보다 더욱 열심히 훈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SK는 세계에서 가장 혹독하게 연습하는 팀이다. 야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주변에서)많은 비난을 받지만 우리로선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렇게 연습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특출한 선수가 없어도 우승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야구와 인생은 '판단'의 연속이다.

모든 스포츠 중 가장 많은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종목이 야구다. 매 상황마다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때론 잘못된 판단으로 경기를 망치기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선택한 전략이 맞아 떨어지며 승리를 이끌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 인생과 같다.
"난 '야신'이 아니에요. 신이면 모든 경기를 다 이겨야지요. 하지만 판단 착오로 뼈아프게 후회한 경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올 시즌 롯데에 4점 앞서다 역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판단 실수로 다 이긴 경기를 졌을 땐 선수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요."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살아오며 가장 잘 한 판단에 대해 묻자 야신 김성근은 "1964년 영구귀국"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태평양 돌핀스 이후 인천연고 구단에서 6년째 감독을 맡고 있지만 인천지리를 모른다. 그는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배인성기자 isb@itimes.co.kr


●김성근 감독은 …

-생년월일=1942년 12월 13일
-신체조건(키/몸무게)=180㎝/82㎏
-혈액형=A형
-출신교=가쓰라고(일본)-동아대
-지도자 경력=마산상고 감독(1969년)→기업은행 감독→충암고 감독→OB 투수 코치→OB 감독→태평양 감독(1989~90년)→삼성 감독→해태 투수 인스트럭터→해태 2군 감독→쌍방울 감독→삼성 2군 감독→LG 2군 감독, 1군 수석코치, 감독 대행→LG 감독→일본 지바롯데 코치→인천SK와이번스 감독(2007~)


●왜 '야신'인가.

'야신(野神, 야구의 신)'. 이 별명은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의 김응용(69·현 삼성라이온즈 사장) 감독이 상대 LG의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에게 붙여준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삼성은 당초 쉬운 상대로 예상된 LG에게 혼쭐이 났다. 천신만고 6차전 끝에 우승한 김응용은 방송인터뷰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마치 '야구의 신'하고 싸우는 듯 했습니다". 그 이후 김성근은 '야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