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행 인천시 노동특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았고 그들을 위해 투쟁해 온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송영길 인천시장 노동특보로 임명됐다. 노동특보 자리를 수락한 이유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국적인 인물이 왜 시장특보를 하게 됐는지를.

   
▲ 이석행 인천시 노동특보가"노동자로서의 삶의 경험을 인천시 노동정책에 반영토록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낮엔 친구 공장에서 일을 하고 근무시간 외에 노동특보 역할을 수행할 작정이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질문이 까칠했는지 돌아온 대답도 조금 까칠(?)했다. "송 시장이 잘 안다. 나를 왜 불렀는지 그에게 물어봐라."
어색한 시간도 잠깐, 곧바로 그와의 솔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전직 민노총 위원장으로 세상살이가 무겁다"라는 말로 시작한 그는 "촛불시위로 감옥간 사이 세상이 변했고, 밖에 나가면 백의종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송 시장과는 90년부터 알고 지내던 노동계선후배사이로 신뢰가 두텁다.
노동특보 수락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방선거에 당선된 이후 송 시장이 7월말쯤 연락을 했다"며 "그때 제안이 들어왔는데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세달 넘게 고민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 끝에 맡게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인천에서 20년을 살아온 시민으로서 인천노동자에게 다가가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한 끝에 내린 결과라고 덧붙였다.


▲송 시장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계양구 계산동에만 20년을 살아 송 시장의 자택과 늘 근거리에 있었다.
일화가 있다. 내가 감옥에 가거나 수배생활을 할 때 송 시장 안주인이 우리 집에 쌀을 갖다 주면서 힘도 주고 그랬다고 한다.
송 시장을 처음 만난 건 1990년 광주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추도식장에서였다. 당시 광주 전남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모여 있었고 내가 노동자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됐다. 단병호 전노협위원장과 사무총장까지 모두 구속된 상태라 내가 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송 시장이 당시 내 연설이 감동적이라며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만나자마자 "손 한번 잡아보고 싶어 왔다"고 송 시장이 말을 건넸고 그때 처음으로 서로 통성명을 했다.
당시 연설 내용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지만 이철규 열사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독재정권에 대항한 노동자의 투쟁을 얘기했던 것 같다.


▲어렵게 노동특보 자리를 수락했는데.

-미리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한바탕 곤혹을 치렀다. 민노총 전임 위원장 출신이 대통령 특보도 아닌 광역시장 특보는 격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민노총 조직위상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내가 수락한 송 시장 노동특보자리는 상시적으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다. 상근 자리였으면 거부했을 것이다. 낮에는 친구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근무시간 외에 노동특보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내가 노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만큼 노동자들의 정책을 시정에 반영하도록 하겠다. 전 위원장 직책을 갖고 온 게 아니라 노동자 이석행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노동자 삶의 연장선이다.
특히 송 시장이 성공해야 인천시민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 시장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그 속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차근차근 챙겨볼 생각이다.


▲직장을 구했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1990년에 해고된 이후 아직 복직을 못했다. 임금을 받고 생활한 게 금속연맹 부위원장 5년, 민노총 사무총장 1년6개월, 위원장 1년6개월 등 7년 이외에는 급여를 받고 생활해본적이 없다. 친구들이 후원회를 조직해 내가 수배되거나 구속되면 집에 쌀도 갖다 주면서 도와주고 있다.
친구 공장에도 취직했고 시장 노동특보도 맡자 와이프가 가장 좋아한다. 무엇보다 건강보험 등 4대 보험이 해결되니까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3명인데 큰애는 재수생이고 나머지는 중3, 중1이어서 감당이 안 된다.
우리 애들은 학원을 잘 모른다. 큰애가 작년에 지방사립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보내지 못했다. 한 달간 토론 끝에 올해 다시 공부해 집에서 가까운 등록금도 싼 대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이제 조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인천에 산지가 2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인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1990년에 다니던 대주 중공업에서 해고된 이후 복직투쟁을 벌이다 당시 단병호, 천영세, 권영길 선배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하지만 서울에는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계양구 변방동에 사는 누님 집에서 기거하게 되면서부터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그후 벌써 20년이 넘었다.
태어나서 가장 오래 산 곳이 바로 인천이다. 인천은 사실상 나에게 제2의 고향이다.
지금 인천은 큰 공장이 떠나고 작은 공장은 일거리가 없다보니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타 지역보다 활성화된 것도 아니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 이들의 소득이 올라가고 소비가 늘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공장들이 인천에 더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중소기업도 인천기업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인천시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비록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이지만 인천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노동자들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인천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가겠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촛불시위를 왜 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민노총 위원장으로 여중·여고생들이 촛불 시위할 때 처음 나가봤다. 중·고생들이 발언하는 것을 보며 죄책감이 들었다. 정의로운 노동운동을 한다는 이 땅의 아버지로서 광우병을 우려하는 아이들 편에 서야겠다고 맘먹었다.
이와 함께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투쟁을 벌였다. 물이 민영화되면 현재 수돗물가격이 10~20배 정도 올라간다. 전기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처럼 전기가격이 7~8배 올라가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할 것이다.
공공요금이 올라가면 당연히 물가가 폭등한다. 그래서 촛불시위때 민영화 반대투쟁을 함께 벌인 것이다. 이명박 정권 공약이 물 시장 세계화 민영화였다. 말로는 공공부분 선진화라고 하지만 핵심은 민영화다. 도로도 마찬가지다. 인천공항 가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불합리한 민영화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 구속됐기 때문에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훈장을 받는 심정으로 감옥살이 잘 하겠다"고.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이석행 노동특보는 …

이석행 인천시장 노동분야 특별보좌관은 1958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났다.
전북기계공고 1회 졸업생으로 초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위산업체인 대주중공업을 다녔고 90년에 해고된 이후 아직까지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95년 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과 98년 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 2004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을 거쳐 2007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8년 촛불시위와 이랜드 파업투쟁으로 구속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