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문을 열던 라우라는 잠깐 망설이는듯 하더니 다시 다다에게 다가와, 다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입술로 쪽 소리가 나게 베소를 한다. 다다 역시 다른쪽 뺨을 대며 똑같이 베소를 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향수 냄새 때문이다. 라우라는 아니다.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면서 그녀와는 포옹하듯 가깝게 몸을 접촉했지만 이런 냄새는 없었다. 그렇다면 초이의 몸에서 나는 것이다. 라우라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동안 다다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초이의 향수 냄새가 지독해서 못참겠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역한 것은 사실 향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세 사람의 몸에서 나는 땀냄새와, 또 탱고 클럽 안에서 밴 다른 냄새들과 뒤섞였기 때문이다. 다다는 조수석에 앉아 있고 초이는 뒷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초이의 상반신은 의자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짧은 치마가 팬티 라인까지 올라가서 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다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초이는 어디에서 살아요?"
"레꼴레따!"

   
▲ 살다가 이런 일도 생기는가요? 진심이든 아니든 이런 일이 생긴다면 싫어할 남정네가 얼마나 있을까요? 자~ 정신을 차립시다.(김충순, 종이 위에 볼펜, 먹물, 수채 29X16.5cm)

초이가 쓰러져서 잠든 줄 알고 다다는 라우라에게 질문한 것인데, 누워 있던 초이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우면서 대답한다. 다다는 뒤를 돌아다보며 초이에게 말했다.
"아, 난 주무시는줄 알았네."
"자긴요. 잠깐 명상 좀 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다다님 호텔 들어가시는거는 봐야죠."
라우라는 아직도 다다를 김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만난지 몇 시간 안된 초이는 편하게 다다라고 닉네임을 부른다. 초이가 살고 있다는 레꼴레따가 어디인지, 다다가 묵고 있는 콩그래스쪽의 호텔 방향인지 궁금했다.
"레꼴레따가 어디에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집값 비싼, 부자 동네에요. 에비타 아시죠? 페론 대통령의 전부인인 에바 페론의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다다님은 아직 안가보셨지만, 촬영 일정 보니까 내일로 잡혀 있던데요?" 라우라가 대답한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와요. 래꼴레따 묘지에 에비타 말고도 아르헨티나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인물들, 귀족들, 갑부들이 많이 묻혀 있데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어떻게 묘지가 관광지가 되나요? 그리고 우리나라 같으면, 공동묘지가 있으면 집값이 폭락할텐데, 여기서는 레꼴레따 묘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집값이 제일 비싸요."
"부자 동네에 집을 얻으신 걸 보니까 초이님은 형편이 넉넉하신가 보다"
다다는 진심으로 부러웠다. 밖에 나가서 초라한 호텔에 묵을 때면 조금 서글퍼지는 것이다. 그런데 초이는 탱고를 배우겠다고 혼자 아르헨티나까지 와서, 제일 집값 비싼 동네에 방을 얻어 산다고 하니까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초이가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그녀의 몸이 흔들거렸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춤에 취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그들을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다다는 잠깐 생각했다. 다다와 라우라, 그리고 초이,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이 이상한 기운은 무엇일까. 그것의 정체를 생각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다는 사춘기 소년은 아닌 것이다.
"초이님은 무슨 일 하세요?"
"저, 놀아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시기 전에 서울에서 무슨 일 하셨는데요? 모아둔 돈 다 가지고 와서 탱고 배우시는거 아니에요?"
"현대무용 전공했구요, 직장은 안다녔어요. 전 겁이 많아서 위험한 동네에는 집을 얻기가 싫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부담은 되지만 안전한 곳으로 숙소를 정했어요."
17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빼어난 미모를 가진 초이가, 험한 동네에 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이는 잡초처럼 살아온 자신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흔적이 그녀의 온몸에서 묻어났다. 하얀 살결, 부드러운 피부, 고통의 흔적을 받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한국에 비해 훨씬 싸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방값은 비싸다고 라우라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다다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머물 때의 한 달 생활비나 방값 같은 것을 라우라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다.
"왜요? 부에노스에 살고 싶으세요?"
"아, 생각 중이에요. 나도 초이님처럼 부에노스에서 탱고를 배울까 하고요."
"정말요? 안가시구요?"
라우라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다다도 말해놓고 보니까 스스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탱고를 배우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가긴 가야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사진작가시라구요? 그런데 왜 제 사진은 하나도 안찍어주세요?"
초이가 투정하듯이 말했다. 초이를 일부러 안찍은 것은 아니다. 탱고클럽 '라 비루카' 안에서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가 그랬다. 그렇다고 차 안에서 허벅지를 다 내놓고 쓰러져 있는 초이를 찍을 수도 없었다. 다다는 카메라의 뷰 파인더를 눈에 가져갔다. 초이는 얼른 새침데기 표정을 짓는다. 찰칵. 다시 초이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한다. 찰칵. 이번에는 화난 표정이다. 찰칵 찰칵. 찰칵. 초이는 뛰어난 모델이었다. 표정변화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다양했다. 다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이나서 연속으로 셧터를 눌렀다. 물론 모델 출신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초이의 외모는 프로 모델과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김선생님 신나셨네요. 아쉽지만 다왔습니다."
운전을 하던 라우라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포즈를 취하던 초이가 비틀거렸다. 다다의 몸도 출렁거렸다.
"미안해요. 고의는 아닌데."
라우라는 진짜 미안한 표정이었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라우라 자신도 모르게 초이를 향한 질투의 감정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다다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럴 때 남자의 처신은 정말 중요하다.
"괜찮아요. 라우라님 운전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다다는 차에서 내렸다. 초이도 따라 내렸다. 다다는 깜짝 놀랐다. 다다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초이가 생글생글 웃는다.
"다다님 따라가면 안돼요?"
"아, 저. 저는 촬영감독님과 같은 방을 써서…."
초이가 큰 소리로 웃는다.
"아쉽네요. 혼자 계시면 다다님 방 구경 좀 하려고 했는데."
초이는 다시 입을 가리고 큰 소리로 웃는다.
"다다님 생각보다 순진하셔. 누가 진짜 따라간데요. 저 앞자리 타려구요. 언니 옆에 앉아서 가려는 거에요."
다다는 정신이 멍해졌다.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진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초이에게 놀림을 당했지만 그녀가 밉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혼자 방을 쓰고 있고, 정말 초이가 방까지 따라온다면,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선생님 가시기 전까지 또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라우라가 손을 내민다. 그제서야 다다는 정신이 돌아온다. 그렇다. 어쩌면 지금이 라우라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가르시아가 다른 일정 때문에 현지 안내를 라우라에게 맡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는한 라우라와 만날 일도 없는 것이다. 다다는 라우라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전해져 온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쉽고 서운하고 간절한 그 무엇이 스쳐 지나간다.
"두 분 너무 오래 손잡고 있는거 아니에요?"
초이가 웃으면서 말한다. 다다와 라우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잡은 손을 뺀다. 라우라가 운전석으로 돌아가면서 말한다.
"정말 탱고 배우시고 싶으면 연락주세요."
"네, 그럴게요."
차의 문을 열던 라우라는 잠깐 망설이는듯 하더니 다시 다다에게 다가와, 다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입술로 쪽 소리가 나게 베소를 한다. 다다 역시 다른쪽 뺨을 대며 똑같이 베소를 했다.
"이제 베소도 잘하시네요."
"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죠."
"여기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요."
"저하고는 안해요?"
초이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끼어든다. 다다는 초이의 양 팔을 잡고 그녀의 뺨에 베소를 한다. 역시 초이의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였다. 처음 맡아보는 향수다. 냄새에 민감한 다다는 냄새만 맡아도 어느 브랜드 몇년도 출시된 향수인지 정학하게 구별할 수 있는데, 처음 맡아본 강렬한 향수였다. 초이의 살결 자체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지만 라우라를 안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라우라는 전체적으로 사람 자체가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초이는 그 느낌이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느낌이 강렬하고 오래갔다. 그만큼 유혹적이었다. 다다는 호텔 문 앞에서 라우라의 차 꽁무니의 빨간 불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어디선가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기는 아르헨티나,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