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길(5)


 

   
 

자정이 넘었지만 탱고바 안의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실내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플로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다다는 생각했다. 그가 탱고를 출 수 있다면 지금 라우라에게 춤을 신청해서 그녀와 함께 아름답게 탱고를 출 수 있을텐데.

라우라는 잠시도? 틈이 없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탱고강사들이 주로 앉는 자리였다. 그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라우라는 인사를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베소로 인사를 한다. 서로의 뺨에 뺨을 대고 입술로 쪽 소리를 낸다. 지나가는 남자들은 라우라를 보고 다가와 베소를 했다.

머리를 뒤로 묶은 한 남자가 라우라와 베소를 한 후 테이블 옆에 서서 오랫동안 수다를 떨더니 라우라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간다. 전형적인 남미 계열의 남자였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홀 안에 퍼졌다. 탱고바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달콤한 꿈
몇 시간이고 지속되던 행복과 사랑
황금 옷을 입었지만 무의미한
키메라같은 마음으로 꿈꾸었던
지난날의 시
결코 해석될 수 없는
덧없는 피난처
그것이 사랑과 흠모의 꿈

당신의 장미정원 꽃들이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때
내 사랑을 기억하리라.
또 깨달으리라
내 깊은 아픔을

우리 사이를 황홀케 하던 시는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내 슬픈 이별로
당신은 그 아픔을 느끼리라…

라우라가 나중에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 곡은 뽀에마(Poema)라는 노래였다. 이별의 시는 역시 가슴을 애잔하게 만든다. 장미정원을 가득 채우며 화려한 장미꽃들이 피어날 때보다는, 그것들이 한 송이도 남지 않고 모두 져버렸을 때, 사랑이 지나가고 이별을 했을 때, 사람들은 탱고를 찾는다. 탱고는 왜 하나같이 슬픔을 노래하고 있을까. 탱고 노래 중에는 사랑의 희열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곡이 훨씬 더 많다. 사랑하고 있을 때보다는 혼자 있을 때 탱고가 더욱 그리운 이유는 상실감 때문일 거라고 다다는 생각했다.

라우라가 땀을 닦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다다 혼자 두고 너무 오랫동안 탱고를 췄다는 생각 때문인지 라우라는 다다에게 맥주를 권했다. 다다는 맥주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라우라가 권하는 술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의 온도는 상승해 있었고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국인이지만,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느낌이 있다. 그 사람이 받은 햇빛과 바람이 다른 것이다.

"지루하지 않으세요? 김선생님도 탱고를 배우시면 좋을텐데."
"지루하지는 않은데요, 탱고는 배울 거에요."
"정말요? 서울에도 탱고를 가르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네. 아르헨티나 떠나기 전에 꼭 알려주세요."

탱고를 줄줄 모르는 사람이 탱고바에 혼자 앉아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다는 탱고 음악을 듣고 있는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곳에 가고 싶다"라고 노래한 사람은 정현종 시인이었지만, 그 섬이 꼭 쓸쓸하고 외로운 것은 아니다. 라우라는 잠시 자리에 앉아있는가 싶더니 또 춤 신청을 받고 플로어로 나갔다.

다다는 혼자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서 밀롱가를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라우라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낮에 촬영할 때와는 다르게 다리 한쪽이 훤하게 노출되는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참 뒤 땀에 흠뻑 젖은 라우라가 자리로 돌아오면서 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화장실에 갔다가 마주친 여자였다.
"제 친구 초이에요."

초이라는 이름은 한국식으로 최를 뜻한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최라는 성으로 시작할 것이다. 라우라와 다다는 마주 앉아 있었는데, 빈자리는 다다 옆 자리밖에 없었다. 초이는 다다의 옆 자리에 앉았다. 라우라가 다다에 대해서 초이에게 간단하게 소개를 해주었다. 간단하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라우라 역시 다다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방송 촬영차 오신 분인데 사진작가다. 이것이 그녀가 다다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초이는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다고 했다. 오직 탱고를 배우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왔다는 것이다. 다다는 깜짝 놀랐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서 지구 반대쪽까지 오는 사람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탱고 학원에서 탱고를 배우다가 현재는 라우라에게 탱고 개인강습을 받고 있는데, 탱고를 배운지는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이도 춤 신청을 받고 플로어로 나갔는데, 확실히 라우라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동작과는 구별이 되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며 무엇인가 시원하게 가슴을 뚫어주는 청량감이 부족했다.

라 비루따는 새벽 3시 이후에는 입장료가 없다. 탱고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프로공연수들은 새벽 3시 이후에 라 비루따로 몰려온다. 그래서 라 비루따의 토요일은 새벽 3시 30분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3시 반쯤 되자 다른 밀롱가에서 공연을 했거나 춤을 췄던 땅게로스들이 줄지어 입장을 한다. 다다는 호텔로 돌아갈까 생각을 했다. 내일 일정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밤을 새고 다음날 촬영을 하는 것을 알면 최피디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이다. 하지만 라우라와 초이를 두고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4시쯤 되니까, 차카레라 음악이 흘러나온다. 플로어에 있던 100여명의 남녀가 네 줄로 나란히 선다. 남자와 여자들이 각각 길게 마주 서 있다가 음악에 따라서 다가가고 돌면서 춤을 춘다. 여자들은 두 손 끝으로 양쪽 치마를 잡고, 혹은 두 팔을 올려 춤을 춘다. 남자들 역시 두 팔을 올리거나 뒷짐을 쥐고 춘다. 라우라는 홀에 나가 있었지만, 초이는 다다 옆에 있었다. 그녀가 다다에게 속삭였다.

"한 번 춰보실래요?"
"네? 저는 전혀 출줄 모르는데요."
"쉬워요. 다른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서 비슷하게 따라하면 돼요."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낯선 춤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홀로 나가서 춤을 출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 초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다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갔다. 여기서 버티면 더 흉한 모습이 연출될 것이다. 다다는 엉겁결에 플로어에 섰다.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초이가 웃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다다가 기억하는 것은 청룡열차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몇 바퀴 돈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어떻게 손을 움직였는지 스텝을 밟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무대에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잠깐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음악이 끝났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들렸다. 초이는 다다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파트너와 춤을 췄던 라우라가 다다의 어깨를 툭 쳤다.

"댄서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