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길(4)


 

   
▲ 누구라도 살아있는 동안 들이마시고 내뿜는 호흡이지만, 우연히 마주했을때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이 서로 박자가 척척 들어맞으며 느끼게 되는 전율과 감동을 혹시 아십니까? (김충순, 종이위에 연필·수채, 190x270㎜)

라우라의 검은머리가 그녀의 어깨 밑에서 출렁거렸다. 건조한 바람이 불고, 다다는 잠깐 침묵했다. 라우라의 눈은 계속 웃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가르시아와 닮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가르시아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한 뒤 필요한 행동만 정확하게 한다. 라우라는 자신의 외모가 사람들 눈에 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은 낯선 사람이라도 손쉽게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이 있다.
몇달 전부터 예약된 일 때문에 오늘만 부득이 가르시아 누나인 라우라가 가이드를 한다는 것을, 다다는 피디로부터 미리 듣지 못했다. 그날 촬영 일정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가장 유명한 탱고 클럽인 콘피떼리아 이데알과, 탱고화 전문업체인 다르코스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밀롱가를 탐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탱고쇼와는 다르게, 탱고를 즐기는 일반 사람들이 모여 탱고를 즐기는 곳을 밀롱가라고 한다. 밀롱가에 가야 진짜 살아있는 탱고를 느낄 수 있다고 라우라는 설명했다. 탱고 음악은 4/4박자로 진행되는 탱고와 3/4박자인 왈츠를 흡수한 발스, 그리고 2/4박자로 진행되는 밀롱가가 있는데, 밀롱가는 탱고추는 장소를 뜻하는 동시에 2/4박자의 탱고 음악을 뜻하기도 했다.
밀롱가 가이드로는 실제 탱고 강사를 하고 있는 라우라가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최피디도 불만이 없었다. 라우라도 탱고 강사를 하기 전에는 가이드 일을 했기 때문에 낯선 업무는 아니었다. 한국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탱고 강사를 한다는 것도 좋은 취재 소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다는 말을 꺼내려다 다시 삼켰다. 그것은 최피디가 판단할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콘피떼리아 이데알은 전세계에 있는 수많은 밀롱가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관광 안내 프로그램에도 들어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탱고바였다. 매일 저녁 수많은 관광객들이 탱고를 보기 위해 찾아온다. 사전 약속된 이데알 매니저 안내로 그들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 넓은 홀을 촬영했다. 낮 시간이었지만 머리가 하얀 노인들 십여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후 3시의 마티니 강습이 막 끝나고 시니어 밀롱가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등이 굽은 노인들의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이 있었고 검은 머리는 한 명도 없었다. 곱게 정장을 차려 입은 노인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왔다. 탱고 음악이 흘러나오자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딩을 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걷기도 힘들 것 같은 노인들이었지만 음악이 울리자 단호하게 내딛는 스텝으로 남자들은 춤을 리드하고, 습기가 빠지고 핏줄이 두드러진 종아리 밑에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여인들은 가볍게 홀 안을 미끄러졌다. 눈덮인 은빛 산들이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수제화 전문업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다르코스는 이데알에서 걸어서 5분도 안걸렸다. 수십년동안 탱고화를 만들던 장인들이 구두를 만드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60대 노인 두 명이 가게 안쪽에서 낡고 두꺼운 손을 움직여 구두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카메라가 가까이 오자 유리 진열장에 있던 반도네온을 꺼내 즉석에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낮이가 큰 강렬한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슬프고 아름다웠다. 두껍게 갈라진 검은 손톱 밑에는 많은 세월을 견뎌온 그의 땀이 배어 있었다. 그가 연주한 반도네온은, 탱고가 아니라 그의 사연 많은 인생이 담겨 있었다. 무엇인가 많은 말들을 반도네온은 내뱉고 있었다.
라우라는 구두를 하나 골랐다. 소파에 앉아서 탱고화를 신어 보는 라우라에게 40대 남자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에 탱고화를 고르던 손님이었다. 남미 계열은 아니고 앵글로 색슨족에 가까웠다. 소파 앞의 두 평도 채 안되는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반도네온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탱고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다.
다다는 숨을 죽였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진원지는 라우라였지만, 자신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화산처럼 솟구쳤다. 온몸을 타고 용암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세계가 흔들거렸다.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다다는 직감했다.


손 뻗으면 닿는 곳에서 그는 라우라의 탱고를 보았다. 어제밤 극장에서 모라 고도이와 막시밀리안 겔라의 탱고와는 또 달랐다. 극장쇼가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테크닉의 안무로 시선을 집중시켰다면, 라우라의 춤은, 다다의 영혼에 화상을 입혔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매혹이었다. 라우라의 탱고는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탱고가 아니라, 무엇인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들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수히 많은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구두 끝에서, 마주 잡은 손가락으로, 사로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통해 그 언어들은 생산되고 유통되었으며 소비되었다.
반도네온의 연주가 멈추자 남자는 라오라와 맞잡은 왼손을 위로 끌어올리며 오른쪽 다리를 길게 앞으로 내밀었다. 라우라는 오른쪽 무릎을 구부리고 왼쪽 다리를 밑으로 쭉 뻗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다는 박수를 쳤다.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박수를 쳤다. 즉석 공연이었지만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어떻게 처음 본 사람과 저렇게 호흡을 맞추며 춤을 출 수 있을까?
"탱고는 고여있는 연못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강이에요. 미리 짜맞춘 형식대로 추는 게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파트너와 하나가 되면서 순간 순간 새로운 스텝을 만들어 갑니다. 상상력이야말로 탱고의 원동력이에요."
라우라는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탱고를 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의 눈빛을 보고 춤을 추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라우라가 탱고를 추는동안 촬영감독은카메라로 찍고 최피디는 밧데리로 작동되는 실내용 조명기를 비추었다. 남자는 자신의 명함을 라우라에게 주었다. 미국 샌디에고에서 화랑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출장왔다가 탱고화를 사기 위해 들렸다는 것이다. 그는 탱고를 춘지 8년 되었다고 했다.
"라우라는 얼마나 추었어요?"
가르시아 가족은 18년 전에 아르헨티나로 농업 이민을 왔다. 지방 농장에 체류하는 의무기간이 끝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사를 했다. 라우라는 가르시아보다 2살 위였다. 대학 때부터 탱고를 추었으니까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다르코스 촬영을 마친 후 호텔로 돌아와 그들은 휴식을 취했다. 밀롱가 촬영을 위해 가르시아가 호텔로 찾아왔을 때는 밤 11시였다. 라우라와 함께였다. 가르시아는 예약된 일정을 마치고 온 것이지만 라우라는 뜻밖이었다. 동생과 교대한 뒤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금요일 밤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밀롱가는 대부분 밤 10시에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꽉 들어차는 시간은 자정 전후다. 밀롱가는 새벽 4시 넘어서까지 계속된다. 주말에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을 위한 시니어 밀롱가가 낮에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밀롱가는 평일에도 밤 10시에 시작한다. 새벽 2, 3시까지 사람들은 탱고를 즐긴다. 그들은 도대체 잠을 자지 않는 것일까? 낮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자는 시간, 시에스타가 있기 때문에 화려한 밤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까르네 힘이에요."
라우라는 그것이 그들의 식습관 때문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스페인어로 까르네는 고기를 뜻한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5대 낙농국 중 하나다. 아르헨티나의 넓은 팜빠에는 수많은 소들이 방목되어 자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유제품이 좋다. 당연히 우유나 아이스크림도 맛있다.
그들이 아르메니아 거리에 있는 밀롱가 라 비루따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될 무렵이었다. 라 비루따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천정이 낮은 넓은 직사각형 홀이 나타났다. 홀 입구에서 다시 계단 두 개를 내려간 곳에 춤추는 플로어가 있었다. 라 비루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밀롱가 중에서도 가장 젊은 밀롱가에 속한다고 라우라가 설명해줬다. 라우라는 자신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면서 그들 일행을 입장료도 내지 않고 무사통과시켜 준다. 그들은 홀 맨 끝, 주방 바로 앞에 있는 예약석에 앉았다. 보통 때는 공연자들이 앉는 자리라고 했다. 라우라는 음식 주문을 한다. 다다는 식욕이 없었다. 푸짐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날아왔고 라우라는 허겁지겁 많이 먹는다. 그런데도 그 몸매가 유지되는걸 보면 신기하다.
홀 건너편 양끝에는 각각 남녀 화장실로 올로가는 계단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껌과 사탕 등을 파는 아저씨가 앉아 있었는데, 다다는 화장실에서 내려오다가 동양계 여자와 어깨를 스쳤다. 다다도, 그녀도 각각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서로 알아챈 것이다.
촬영허가는 맡았지만 라 비루따의 천정이 너무 낮고 어두워서 촬영감독이 고개를 흔든다. 최피디는 촬영을 포기한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기 때문에 호텔로 철수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다다는 밀롱가에 남아서 살아있는 탱고를 보고 싶었다. 결국 촬영감독과 최피디는 호텔로 돌아가고 가르시아도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나갔다. 다다와 라우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