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펜더 기타 헌정받은 록의 대부 신중

내달 9일 하남서 두 아들과 '헌정기타 기념 콘서트'
가난 위로해준 기타 독학뒤 미8군서 톱스타로 우뚝
"순간적인 대중 현혹 음악은 오래가지 못해" 일침
美社 2곳서 음반 제작 … 50년 음악인생 세계무대 도전

 

   
 


한국 록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기타의 신' 신중현(72).

칩거 중이던 그에게 세계적인 기타 제작사 펜더(Fender)가 지난해 말 특별 제작한 맞춤형 기타를 신중현에게 헌정했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다. 선후배 음악인들과 언론에서는 입을 모아 "펜더의 기타 헌정은 한 뮤지션의 영광이 아니라"며 "한국 록음악을 해외에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혼자 50년 음악 인생을 정리하던 그가 다시 기타를 메고 대중들 앞에 나섰다.

가요계 최고참이지만 그의 음악 인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아시아인 최초! 펜더기타 헌정 받은 신중현의 '헌정기타 기념공연 콘서트'가 한창인 가운데 10월에는 미국에서 음반 발매도 앞두고 있다. 기타를 들고 다시 대중 앞에 선 신중현을 지난 15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자택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 기타 한 대가 그를 무대로 부르다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펜더 기타를 헌정받은 신중현은 이 기타를 들고 하남, 순천, 마산, 일산 등 전국 20여 개 도시의 무대에 오른다. 전국 투어 공연준비에 음반 준비까지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가 과연 은퇴한 것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는 지난 2006년 12월 은퇴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났다.

5년 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집을 짓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혼자 밥 해먹으면서 음악과 연애만 하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불러낸 것은 미국에서 건너온 한 대의 기타였다.

"용인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2009년 12월 세계적인 기타 전문회사 팬더사측으로부터 기타를 헌정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꿈의 기타고 신이 내려준 기타였다. 정말 귀한 기타를 받았는데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 못생긴 얼굴이지만 최고의 기타 연주를 대중들에게 들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펜더는 전문 연주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지금까지 펜더 기타를 헌정받은 뮤지션은 에릭 크랩튼, 제프백, 스티비 레이본, 잉베이 맘스틴, 에디 반 헤일런이 있다.

헌정기타 연주의 진수는 오는 10월 9일 저녁 7시 하남문화예술회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를 이어 뮤지션의 길을 걷고 있는 세 아들 가운데 첫째 대철(시나위), 둘째 윤철(서울전자음악단)씨가 함께 무대에 올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신씨는 "이번 하남 공연 1부에는그간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트곡을 위주로 준비하고 2부에서는 헌정기타로 테크닉적인 면을 발휘해 한국적인 락 음악을 들려 줄 예정이다. 헌정기타의 진가를 표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 가난속에서 꽃핀 음악

신중현은 1938년 1월 4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이발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만주 신징에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해방이 되자 귀국열차를 탔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정착했던 그의 가족들은 다시 충북 진천으로 피난을 갔다. 동네 밖 움막에서 살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해 사이를 두고 연이어 세상을 떴다. 이어 여동생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하나 남은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해 그 때부터 생계를 위해 노동 일을 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노동으로 모은 돈으로 기타를 사고 독학으로 기타주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는 가난과 삶의 고단함을 음악으로 이겨냈다. 결국 서라벌 고교 2학년 때 자퇴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타를 배우려고 그를 찾아왔던 미8군 소속 쇼단 무용수의 소개로 신중현은 드디어 한국 록음악의 발상지인 미8군 무대에 입성하게 된다. "그 시절 정말 배고팠어요. 이렇게 키가 작은 것도 못 먹어서 그렇죠. 그 때는 쌀밥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굶은 게 이력이 났죠. 요즘 젊은이들은 배고픔이 뭔지 모를 겁니다."

#. 가장 행복했던 미8군 시절

신중현은 16세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하다가 1955년 미8군의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Spring variety show)'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그는 미군들의 기호에 맞춰 재즈, 스탠더드, 팝, 록음악을 다양하게 연주하며 미8군의 톱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군들이 나를 '꼬마'라고 불렀어요. 200여개의 쇼단체와 밴드가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는데 신중현을 모르면 미군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죠. 당시 출연료로 2천원을 받았는데 기타 실력을 인정 받자 3만원 가까이 몸값이 좋았다. 덕분에 창고 생활 정리하고 하숙집도 구했다."

그는 1963년 기타, 보컬,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로큰롤 밴드 '애드포(Ad4)'를 결성해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 등 한국적인 리듬을 경합시킨 독특한 사운드를 개척해 나갔다.

1973년에는 자신이 기타와 보컬을 맡고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3인조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한 뒤 4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한국적 록사운드가 담긴 대표작들을 남겼다. 이후 1986년에는 라이브 클럽 '록월드(Rock World)를 개관해 록 음악가들의 연주 공간을 제공하는 등 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며 한국적 록의 완성을 위한 작업에 매진했다.

또 수많은 가수들을 발굴해 '신중현 사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서정길, 장미화, 이정화, 펄시스터스, 김추자, 김상희, 장현, 임아영, 김정미, 박인수, 임희숙, 임성훈, 조영남, 트윈폴리오, 바니걸스, 이성애, 이승연, 인순이, 이문세, 강승모, 김완선 등에게도 곡을 줘 그들을 한국 대중가요의 중요 아티스트로 끌어올렸다.

"비록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당시는 음악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감사했다." 어쩌면 10여년의 미8군 시절이 그의 인생에 있어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아니었을까.

#. 세계가 주목 … 10월 미국서 음반 발매

펜더사의 헌정기타를 받은 후 그에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의 음악성을 인정한 미국 음반 회사 2곳에서 음반 제의가 들어왔고 요즘 제작이 한창이다. 신중현의 50년 음악인생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을 세계무대에서 검증받는 절호의 기회다.
 

   
▲ 시골에서 조용히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마음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지만(위) 다시 무대 위에 오르는 그는 여전히'록의 대부'다운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아래). 맨 위는 친필 사인.


고희를 넘긴 노장이지만 그의 기타는 잠들지 않았다. 가족, 선후배들과 떨어져 오로지 음악작업과 연주에만 집중하고 있다. "나이 탓인지 몰라도 하루가, 한달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해야 할 일은 태산이다 보니 인간관계도 실용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외로울 때도 있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50년 넘게 음악인으로 살아온 그지만 창작을 위해 다른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만의 음악성을 지키기 위해 길 가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도 귀를 막을 정도라고 한다. 고집스럽다.

원로 락가수로서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요즘 한국 음반시장에 대해 그는 못마땅한 게 많다.

"음악은 무엇보다 대중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은 대중이 들으라고 하는건지 아니면 개가 들으라고 음악을 만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유행하는 흑인음악이나 일본, 미국 주류 음악의 테마를 감안해 변형한 음악들을 만들어 짧은시간에 젊은이들을 현혹시키는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순간적으로 대중을 현혹시키고 홀리는 음악은 오래가지 못한다."

신중현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바로 기타로 세계 음악계를 제패하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락은 아직까지도 천대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락 음악의 기법이나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신중현만의 음악성으로 세계 어느 곳이든 누비고 싶다. 이는 곧 한국 락 음악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하는 숙제다." 뛰어난 기타실력과 작곡능력 뿐만 아니라 꺼지지 않는 '락'의 저항정신으로 50년 음악인생의 순수성을 고수해온 신중현. 신의 노래와 연주에 걸맞는 최고의 무대. 이제 우리에게는 그것을 확인하고 놀랄 준비를 해야하는 행복한 시간만이 남아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추석명절 때 손주녀석들에게 줄 장난감 선물을 무엇으로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노장의 발걸음은 외롭지 않아 보였다. 그의 손에는 기타가 들려 있었다.
/글·사진=강현숙기자 kang789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