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가끔 까페에 앉아서 물잔에 눈을 가까이 대고, 면이 고르지 못한 유리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하지요. 사물이 불규칙하게 보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지요. 늘 그러는 건 아니고, 누굴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낼 때입니다.(김충순, 종이위에 연필·수채, 137mmx 392mm)


공연은 2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중간 인터미션을 전후로 1부는 전통 탱고, 2부는 누에보 탱고와 퓨전 탱고로 나뉘어져 있었다. 1부와 2부의 탱고는 전혀 다른 춤으로 생각될 정도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전통 탱고는 남녀가 가슴과 머리를 A자 모양으로 맞대고 추는 데 비해, 누에보 탱고는 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1:1의 자세로 추었다. 느낌도, 동작도, 음악도 달랐다. 전통 탱고 음악은 강약이 뚜렷하고 높낮이가 심하면서 드라마틱하고 비장한데 비해서, 2부의 음악들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만들어진 탱고 음악이었다. 탭댄스와 발레, 현대무용도 등장해서 탱고를 중심으로 다양한 춤들이 뒤섞인 형태였다.
탱고,
그것은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팔, 하나의 심장으로 추는 춤.
공연이 끝난 후, 연출자의 안내로 분장실에 가서 주인공들을 인터뷰했었는데, 모라 고도이는 두 사람이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이는 탱고를 이렇게 정의했다. 정말 무대에서 서로 가슴을 맞대고 두 손을 잡은 채 탱고를 추는 커플들을 보면, 다리는 네 개가 빠르게 움직이는데 손을 맞잡고 있기 때문에 팔은 두 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나의 심장?
"탱고는 육체를 움직이지만 매우 정신적인 춤이에요.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교류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탱고죠. 서로 가슴과 가슴이 통하지 않고 탱고를 출 수는 없습니다"
십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전의 대한극장에서 본 셀리 포터 감독의 "탱고레슨"이 생각났다. 그는 그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 소설 "올란도"를 영화로 만들었던 셀리 포터 감독 자신이 직접 출연해서,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탱고를 배웠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 영화 속에서도 두 사람의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다고 했었다. 정신이 육체보다 우선하는 춤? 다다는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그것이 관념적 수사는 아닐까? 춤은 분명히 육체로 추는 것인데, 어떻게 정신적 교류가 더 중요한 것일까.
"탱고레슨"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의 세계적 탱고 댄서인 파블로 베론이, 셀리 포터 감독의 탱고 스승으로 등장한다.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던 셀리 포터 감독은 새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다가 우연히 본 탱고에 매혹되어서 파블로 베론을 찾아가 개인레슨을 받는다.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그들은, 파블로의 제안으로 파트너가 되어 함께 공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도 방문한다.
영화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춤도 매혹적이었지만 다다는 셀리 포터 감독처럼 자신이 직접 탱고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탱고는 키가 훤칠한 남자가 여자를 자유자재로 리드하면서 때로는 격정적으로 안고 때로는 높이 들어올리기도 해야 하는데, 그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무대 바로 앞에서 공연을 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분장실에 들어가면서 확실하게 다짐을 했다. 탱고를 배워보겠다고. 왜냐하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남자 탱고 댄서들이 크지 않았다. 다다보다 작은 남자들도 많았다. 분장실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모라 고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대에서는 키가 크게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다다보다 훨씬 작았다.
"탱고는, 춤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듣고 파트너와 함께 자연스럽게 걷는 겁니다. 춤은 그들의 내면의 대화죠"
통역을 맡은 가르시아가 한국어로 설명하는 사이, 공연의 피로를 풀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모라 고도이 옆으로 막시밀리안 겔라가 다가왔다. 브로드웨이로 진출해서 세계적인 발레리노로 성장한 그는 온몸이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모라 고도이가 참여한다고 해서 이 공연의 캐스팅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그녀는 탱고의 여신이죠"
"전 어렸을 때부터 탱고를 추었지만 클래식한 음악을 좋아합니다. 피아졸라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제가 어릴 때는 그런 음악이 없었거든요. 막시밀리안의 발레에서도 피아졸라같은 현대 탱고 분위기가 나요. 그래서 저도 이번 작업이 너무 즐겁습니다."
그들은 다다를 가운데 두고 함께 포즈를 취했다. 촬영 감독은 방송용 카메라가 아니라 목에 걸고 있던 자신의 DSLR로 사진을 찍었다.
"무대에서 볼 때 당신은 키가 굉장히 커 보였다. 아마 당신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와 위대한 공연정신이 당신을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다다의 말에 모라 고도이는 웃으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에 있다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찾아오라고 명함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다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분장을 지웠다.
"탱고 배우고 싶어요"
밤 12시가 가까워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다는 그렇게 말했다.
"모라 고도이 스튜디오 가보실래요? 아니면 탱고 개인레슨하는 사람 잘 아는데 소개해 줄까요?"
운전을 하던 가르시아가 백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다다를 보며 말했다. 평일이었고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거리에는 차들이 제법 많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돼요"
최피디가 깜짝 놀라 그들의 대화를 얼른 중단시킨다.
"김선생님은 촬영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최피디는 3주 동안의 촬영을 마치고 50분짜리 4개 분량으로 편집해야 방송국에 납품해야 한다. 방송국 자체 제작이 아니라 외주 프로덕션 제작이었고 그녀는 프로덕션에 소속된 피디 중 한 명이었다. 이런 해외 촬영 프로그램은 보통 프로덕션내의 고참들이 주로 맡는다. 30대 초반의 그녀는 처음에 VJ로 시작해서 온갖 궂은 일 다하다가 이제는 인정받는 중견 피디가 되어 해외 촬영까지 도맡아 하게 된 것이다. 방송국에서 받는 편당 제작비가 얼마인지 다다는 모른다. 피디로서의 그녀의 능력은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얼마나 제작비를 절감해서 경제적으로 찍는가 하는데 있었다. 프로덕션에서는 프로그램을 잘 연출하는 피디보다 회사에 많은 이익을 남겨주는 피디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촬영 마치고 배우면 되죠."
"한국으로 안돌아가고 탱고 배우실 거에요?"
최피디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억지웃음은, 혹시라도 전체 촬영 일정 중에서 다다가 탱고를 배우겠다고 시간을 빼달라는 불상사가 있을지 몰라 미리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콩그래스의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앞자리에 앉은 촬영감독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최피디와는 해외 로케를 여러 번 같이 가서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남녀관계다. 아주 둔하지 않다면,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서로 편하다. 다다는 인천공항에서 최피디와 박감독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만 보고도 그들의 관계를 직감했다. 뉴욕의 JFK 공항에서 4시간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를 기다릴 때, 나란히 앉은 박감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최피디는 잠들기도 했다.
"신사장은 탱고 못춰요?"
다다는 가르시아에게 물었다. 가르시아의 한국 이름은 신상훈. 그는 정식으로 등록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사장이었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를 찾아오는 방송국이나 잡지사 등을 위해 일정을 짜고 안내를 하며 통역까지 맡아 하는 코디 역할을 하면서 비용 정산을 위한 영수증 발행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등록을 한 것이다. 회사라고 했지만 그와 그의 둘째 누나가 전 직원이었다. 필요할 때는 결혼한 큰 누나도 도와준다고 했다.
"전, 탱고 못 춰요. 살사 춰요"
"네?"
다다는 깜짝 놀라서 가르시아를 바라보았다.
"여기 젊은 친구들은 탱고 잘 안춰요. 살사를 더 많이 춰요"
의외였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누구나 탱고를 추는 줄 알았는데 가르시아가 살사를 춘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가르시아는 호텔 앞에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 뒤,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우리 누나가 탱고를 춰요. 시내에서 탱고 강습도 하고 있고요."
"그럼 아까 소개해 준다는 개인레슨 탱고 강사가 신사장 누나에요?"
"네. 우리 누나라서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는 꽤 유명합니다. 인기 많아요"
신사장은 얼굴선이 부드러웠고 이목구비가 여자처럼 예쁘다. 그의 누나라면 분명히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여인이 탱고를 춘다고 상상해 보니까 다다는 숨이 가쁠 정도였다.
최피디는 박감독을 흔들어 깨웠다. 신사장은 촬영 장비를 트렁크에서 꺼내 호텔까지 들어다 주었다. 그리고 최피디와 작은 소리로 몇 마디 주고 받은 뒤, 돌아갔다.
샤워를 하기 전, 좁고 낡은 방을 바라보는 다다의 눈빛에서 답답함을 느꼈는지 박감독이 말했다.
"김선배, 불편하시면 혼자 이 방을 쓰셔도 됩니다."
다다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아무리 제작비 절감이 중요하지만 이렇게 낡은 호텔은 스텝의 한 명으로서 게스트인 다다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박감독이 다라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방을 하나 더 잡아서 자신이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혼자 방을 쓰고 있는 최피디 방으로 자신이 갈 수도 있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한국과 정반대로 시차가 바뀐 탓도 있지만 무대 바로 앞에서 본 탱고의 강렬한 이미지가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박감독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말 아무 데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잠을 잘자는 타입이었다.
다다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 혼자 호텔을 빠져나왔다. 호텔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문을 연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칫솔을 팔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는데, 박감독은 가방을 싸고 있었다. 호텔을 먼저 옮기고 일정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다가 칫솔 사러 갔다가 그냥 왔다는 말을 듣고 박감독은 자신의 칫솔을 꺼내주었다.
"제가 사용한 것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양치하세요"
다다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칫솔을 써본 적이 없다. 여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남자가 사용한 칫솔을 사용하다니. 하지만 그것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서울 떠난지 벌써 사흘이 되는데 아직도 양치를 한 번도 못했다는 것이다. 다다는 결국 박감독의 칫솔을 사용했다.
"안녕하세요?"
호텔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 여자였다. 키가 다다보다 약간 컸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가르시아의 누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