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적동물이라는 전제아래서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은 그 사회의 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산업사회를 먼저 거친 나라들은 지식사회를 지나 문화사회를 구가하고 있다. 우리는 산업사회를 거친 몇 나라와 더불어 방금 지식과 문화를 동시에 발전시켜 단숨에 이상사회를 실현하려는 숨찬 노력을 하고 있다.


문제는 지식사회라는 것이 단순히 기존의 정보를 많이 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야한다는 능동적인 측면이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이유로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현안을 다룰 때 교육문제가 맨 앞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백약이 무효였던 인천교육이 환골탈태하려면 창조적인 면에 눈을 돌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좋은 직장을 위해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는 기존의 틀을 깨야한다. 그런 생각으로 대학에 간 학생은 공부보다는 취업에 목을 매게 되고 또 대학이 이에 이끌려 취업학원으로 기울게 되면 창조적 역량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학력인플레, 출석만 하면 A학점이라는 세간의 풍문이 거짓이기를 바란다.

부실한 교육은 결국 낙후된 연구로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를 희미하게 만든다.

교육이란 미성년을 자립시키는 과정인데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결국 학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인데 현실은 오직 학생에게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선생님은 가르치고 학생은 외우는 틀에 매어있다.

창조란 절대적인 자유가 필수 조건이다. 국가, 교육청, 학교장이 시스템이라는 것을 꽉 쥐고 있으면 자유는 숨을 쉴 틈이 없다.

사립학교에 국민의 세금을 지원한다는 보조형사립학교(?)의 발상도 이것이 과연 사립학교인지 대입전문학원인지 본질이 의심스럽다.

이에 대칭하는 공립학교의 위상은 무엇인가? 진정 창의적 열의를 발휘할 수 없는 공사립학교의 교원들의 능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분들에게 다양한 실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교원들이 요구하고 교육청이 시중을 드는 것이 순리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법을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 창조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철학'이라는 명구가 오늘의 독일을 만들었다는 것을 되새김질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무엇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빨리 파악하는 일이다. 창의적 목적으로 설계된 시스템은 잘 갖추어져 있다. 정보고, 공고, 농고, 수산고, 과학고, 외고, 인문고, 대학의 연구소 등등 열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양한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

가보지도 못하면서 오직 명문대에 가서 남보다 잘 살아보겠다는 부당한 경쟁심이 세상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비가 새는 지붕에서도 창조적 열의만 있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벌어진 기왓장 틈으로 별을 잡으려던 마담 퀴리가 드디어 노벨상을 거머쥐었듯이.



양효성씨=서울에서 부산까지 조선의 옛길인 죽령대로를 두 달간 도보로 여행한 기록인 '나의 옛길 탐사기1·2'권을 출간했다. 기원전 30년께 서한시대 말 환관 출신의 사유(史游)가 편찬한 한자교본 '사유 급취장'을 번역했으며, 이 책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