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다는 시계를 보았다. 바늘이 위 아래로 두 개가 있는 구찌오 듀얼 타임 워치다. 윗 바늘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짝수 숫자가, 아랫 바늘에는 로마자로 3, 6, 9가 새겨져 있고, 용두도 보통 시계처럼 좌우가 아니라 직사각형 스텔케이스에 상하로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시계였다. 그러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듀얼 타임 워치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지금처럼 낮 1시 30분이면 서울은 밤 1시 30분이다. 서울과 정확하게 12시간 차이가 난다.

가르시아가 그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콩그레스 주변의 작은 호텔이었다. 다다가 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리는 사이, 최피디와 가르시아가 먼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있는 그 호텔의 작은 문은 그들이 들어간 뒤 닫혀버렸기 때문에 다다와 촬영감독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인터폰을 누르고 대화를 해서 신분을 확인한 뒤 안에서 스위치를 눌러야만 열리는 구조였다.

길가에 세워진 차 옆에서 촬영감독은 담배를 피웠다. 다다는 길가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뉴욕 JFK 공항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4시간동안 박감독은 다다의 카메라에 관심을 표시했다. 두 사람 모두 카메라를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약간의 동류의식이 있었다. 박감독도 고급 DSLR을 가지고 있었다. 방송을 위한 촬영은 디지털 캠코더로 하지만, 개인 홈피에 올릴 사진을 별도로 찍는다는 것이다.박감독이 담배를 두 대 피운 뒤에야 최피디와 가르시아가 나왔다. 다다를 바라보는 최피디는 웃고는 있었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1층 문을 열자 계단이었고 호텔은 2층에 있었다. 호텔이 아니라 유스 호스텔이었다. 주로 배낭여행하는 젊은 대학생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최피디는 서울에서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저렴한 호텔을 부탁했고 가르시아는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저렴한 이곳을 예약한 것이다. 그러나 '저렴한 호텔'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에 오차가 있었다. 최피디가 주문한 곳은 이 정도로 저렴한 호텔은 아니었다.

방은 작고 낡았다. 유스호스텔은, 방에는 침대만 있고 공동욕실을 이용하게 되어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다다가 들어간 곳은 그래도 욕실이 있는 방이었다. 예약하는 과정에서 이미 돈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최피디는 하루만 유스호스텔에서 자고 다음날 호텔을 옮기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방이 좁았기 때문에 일정에 대한 회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호텔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허기져 있었다. 레스토랑은 텅 비어 있었다. 2시가 넘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것이다. 천정에서 한가하게 돌아가고 있는 프로펠러 선풍기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빈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르시아가 식사를 주문했고 병에 담긴 물이 먼저 서비스되었다. 최피디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르시아와 일정 협의를 했다. 두 사람이 협의를 하는 동안 박감독과 다다는 물을 마셨다. 다다는 리포터였기 때문에 일정은 전적으로 최피디가 결정할 문제였다.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는 후덥지근한 실내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는 최피디와 가르시아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물만 마셨다.

"맥주 한 잔 하시겠어요?"

최피디는 호텔 문제로 미안했는지 다다에게 물었다. 다다는 박감독을 바라보았는데,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낄메스'라는 맥주가 나왔다. 박감독이 다다의 잔에 맥주를 채웠다. 최피디와 가르시아는 물을 마셨다. 박감독은 맥주 마니아였다. 최피디와 가르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일정 협의를 계속하는 동안 박감독은 지금까지 자기가 마셔본 세계 각국의 맥주 맛의 차이에 대해 다다에게 설명했다.

최피디는 가르시아가 예약한 호텔을 보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가이드를 잘못 만나면 촬영이 매우 힘들게 진행된다는 것을 최피디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가르시아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있었다. 최피디와 대화를 하는 도중 가르시아는 전화를 꺼내 몇 번 통화를 했다. 내일 옮길 다른 호텔을 예약했고, 오늘과 내일의 촬영 스케쥴에 대한 조정을 끝냈다. 그가 통화를 하는 동안 다다와 박감독은 동작을 멈추고 가르시아를 바라보았다. 역시 스페인어는 낯설었다. 세계문화기행 프로그램을 하면서 세계 각지를 다녀본 최피디도 스페인어는 할 줄 몰랐다.

그때서야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소고기 요리와 만두였다. 식사를 하면서 최피디는 오늘과 내일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다다는 맥주를 마시면서 설명을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긴 여행 때문에 피곤하니까 오후에는 호텔에서 쉬고 저녁에 탱고 공연을 하는 극장으로 이동해서 공연을 본 뒤 공연 관계자들을 인터뷰한다는 것이다.

다다와 박감독은 2인 1실 호텔방을 같이 썼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샤워를 했다. 다다는 누군가와 같은 방을 쓴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혼자 사는 집에서는 샤워를 한 뒤 언제나 알몸으로 나와서 거실에 앉아 있거나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끼리 같은 방을 써도 알몸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샤워를 하고 다시 옷을 입는 것은 분명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창문의 커튼을 닫고 불을 끈 뒤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각각 마주보는 벽에 붙어 있었다. 불을 끄고 눕자마자 곧 박감독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참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는 한낮이지만 서울은 새벽 4시인 것이다. 샤워를 했지만 다다는 개운치가 않았다. 뉴욕의 JFK 공항 화장실에 가서 세면가방을 열어본 뒤에야 칫솔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30시간동안 비행하면서 양치를 하지 못했고 지금 샤워를 할 때도 양치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칫솔 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최피디가 전화를 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동전을 바꿀 때 그도 따라갔어야 했다. 다다도 조금 뒤척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선배" 박감독이 몸을 흔들며 다다를 깨웠다.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을 닫아서 어두운 것인지 정말 밤이 된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다는 박감독보다 2살 위다. 서로 갖고 있는 카메라 기종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JFK 공항에서부터 박감독은 다다를 '김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다는 김우늠이라는 자신의 이름 대신 주변의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듯 '다다'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했지만 박감독은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여전히 '김선배'라고 불렀다.

그때 '똑, 똑' 노크 소리가 난 뒤 최피디가 들어왔다. 최피디는 혼자 다른 방을 썼고, 박감독과 다다가 자는 동안 그 방에서 가르시아와 스케쥴에 따른 준비를 했다. 극장 촬영에 따른 협의가 필요한 것이고 누구를 인터뷰 할 것인지 사전에 조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잠을 많이 잤지만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동거리가 길면 몸이 피곤해진다. 가르시아가 운전을 하고 그 옆 자리에 최피디가 앉았다. 박감독과 다다는 뒷자리에 앉아서 각각 다른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차는 밤거리를 달려 항구 쪽으로 향했다.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이 보였고,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들이 들짐승처럼 모여 있었으며 가로등 불빛이 차가운 눈으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뿌에르또 부에노스 아이레스 Puerto Buenos Aires'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라는 뜻의 공연제목과 주요 출연진들 네 사람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는 간판 밑에 그들은 도착했다. 극장 입구는 한가했다. 공연이 시작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만 했다. 다다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모라 고도이, 막시밀리아노 게라, 빠트리시아 소사 등의 이름이 보였다. 가르시아의 설명을 따르면 막시밀리아노 게라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주 유명한 스타 중 한 사람인데 원래 발레와 텝댄스를 추는 사람이고. 빠트리시아 소사는 젊은 층에서 인기 있는 가수라는 것이다. 탱고 공연인데 가수와 발레 댄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을 보니까, 다른 한 사람인 모라 고도이가 탱고 댄서인 것 같다고 했다.

극장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까 검정색 바닥과 벽면으로 꾸며진 커다란 극장 내부가 보였다. 홀에는 수많은 사각형 테이블이 무대를 바라보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얀색 식탁보가 검정색 극장 안에서 눈부셨다. 중앙 무대 역시 검정색이었다. 그들은 2층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턱수염이 멋있게 난 연출자가 환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다다는 구스타보 싸약이라는 연출자와 인터뷰를 했다. 가르시아가 통역을 했다. 2층 대기실 밖으로 항구가 보였다. 검은 물 위에서 불빛이 유리조각처럼 부서지며 반짝였다.

구스타보 싸약은 2008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뮤지컬 연출자로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불고기', '김치' 등을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한국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 연출한 '뿌에르또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흥행 성공해서 세계 순회공연을 하게 되면 꼭 한국에 가겠다고 말했다.

다다는 첫 사랑이 생각났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때문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노만 쥬이슨 감독의 이 영화를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녀와 같이 보았다. 영화가 끝나기 전,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헤어질 때까지 그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디너쇼였다. 비싼 요금을 지불한 관객들은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찼고, 모두 화려한 정장 차림이었다. 대부분 관광객들이다. 최피디와 가르시아는 2층 뒷자리에 있고, 박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이동하면서 촬영하기로 했다. 다다 혼자 1층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있었다. 식사가 먼저 시작되었고 웨이터들이 분주하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녔다. 한국과 인연이 있는 연출자 배려로 앞 테이블에 앉았지만 디너쇼 비용을 내야만 음식 서비스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다다는 자리에 앉아서 물만 마셨다. 촬영 끝나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최피디가 말했지만 다다는 예산을 절약하기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다다가 탱고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