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우리민족대회'대북사업 신호탄2007년 지자체 최초 北 공식방문 성과도
   
 


 

   
 

2004년 6월15일, 인천이 남과 북의 오작교가 됐다. 6·15 공동선언 4돌기념 우리민족대회가 인천 곳곳에서 열렸다. 전쟁 도시 인천에서 통일 도시 인천으로 거듭나는 순간, 270만 인천 시민, 7천만 우리 겨레는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인천의 대북사업 신호탄이 된 우리민족대회, 인천은 이 때부터 한반도 통일전진기지가 됐다. 인천 곳곳에서 다양한 통일 관련 행사가 열리며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북측을 받아들였다. 인천시는 조심스럽게 동토를 두드렸다.
멀게만 생각하던 그 곳이, 바로 옆 이 곳으로 좁혀졌다. 인천 우리민족대회 참가를 위해 인천 땅을 밟은 북녘 100여명 동포들과 생애 첫 대화가 오고갔다.
무슨 말을 하나, 어떤 음식을 먹나, 북녘 동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됐다.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앞서 강화도 참관의 기회가 주어졌다. 북측대표단은 강화 역사박물관을 찾아 선열의 호흡을 느꼈고, 남북 긴장의 최전선에서 분단이라는 민족의 현실에 아파했다.
폐막식이 열린 6월16일 저녁 식사자리, 남과 북이 서로 앉아 얘기꽃을 피울 때 일순 남측 참가단의 눈빛 교환이 오갔다.
'음식 중 일부가 맛이 변한 것 같다. 우리가 모두 먹어 없애자.'
북녘에서 온 동포가 자칫 탈날까 남측 참가단의 마음 씀씀이로 한민족은 다시금 끈끈해졌다. 떠나는 인천국제공항 대합실은 기약없는 이별에 눈물바다가 됐다.
대회 후 인천시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2005년 인천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의 북측 선수단·응원단 초청 문제 때문이다.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성황리에 치르기 위해서는 북측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을 초청하기 위한 인천과 북측의 줄다리기가 십 수차례 이어졌다.
시에서 조명조 당시 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이 협상 대표로 나섰다. 조 국장과 북측의 김지선 당 중앙위원은 중국 베이징, 심양은 물론 금강산, 개성 등을 오가며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 초청을 놓고 때론 고성이 오가는 격렬한 회담을, 만찬과 비공식 회담 등을 통해 상당히 진척됐다.
북측은 선수단과 20세 미만의 응원단 파견을 승인했고, 인천은 북측에 당장 필요한 아스팔트 원료(피치)를 제공했다.
우리민족대회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가 연이어 개최되며 인천은 평화와 통일 도시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2007년 11월 안상수 전 시장과 박승숙 전 시의회 의장 등이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북측을 공식방문했다. 이들은 평양과 개성, 남포 등을 찾아 북측의 현실을 목격했고, 인천과 북측의 교류협력방안을 몸소 깨우쳤다.
안 전 시장의 방북 목표는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였다. 인천은 아시안게임 유치도시로 선정되기 위해 북측의 도움이 절실했다.
안 전 시장은 북측에 아시안게임 공동개최 혹은 분산개최와 인천과 개성을 오가는 마라톤대회, 북측 체육시설 개·보수 등을 약속했다. 인천과 북측은 손을 잡고 아시안게임 유치에 올인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2006년 10월6일 북측은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화해와 협력의 남북 관계가 긴장 상태로 뒤바뀌었다.
지자체는 물론 정부의 대북 사업도 '올 스톱' 됐다. 인천과 북측의 협력 관계도 자연스럽게 끝모를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다음해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남측 방문 일정에서 인천이 또다시 부각됐다. 김 부장은 꼭 '인천'을 찾고 싶다고 요청했고, 김 부장은 인천에서 통일 한반도의 밑그림을 그리고 떠났다. 김 부장이 송도국제도시 내 갯벌타워를 방문했을 때 "인천에서 한반도를 본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어진 인천의 대북사업은 '민족'을 위한 사업으로 바뀌었다.
2007년 말 북측을 휩쓴 대홍수를 돕기 위해 인천에서 십시일반 성금이 모금돼 홍수피해물품이 북측에 전달됐다.
열악한 북측의 치과 치료를 돕기 위해 인천 시민이 중심이 된 평양치과병원 현대화사업이 전개됐고, 2008년 10월6일 평양치과병원 준공식을 찾아 인천 대표가 떠났다.
2009년 2월 인천 유나이티드 FC 유소년 축구단과 평양 천리마 유소년 축구단의 친선경기가 열리며 다시금 인천의 대북관계에 청신호가 들어왔지만 남북의 냉전관계와 천안함 사태 등을 겪으며 지금껏 별다른 진척이 없다.
/이주영기자 blog.itimes.co.kr/leejy96



● 인천 대북사업 일지
2005년 - 인천, 북측에 피치·페인트 지원
2005년 5월 - 북측 첫 인천 공식초청
2005년 8월 -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북측에서 선수단·응원단 파견
2005년 11월 - 시 경제단대표 평양 방문
2006년 10월 - 남북교류사업 중단(북측 1차 핵실험)
2007년 11월 -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인천 방문
2007년 12월 - 인천, 북측에 홍수피해물품지원
2008년 4월 - 평양치과병원 현대화 사업 지원 시작
2008년 9월 - 평양 창광거리 현대화 사업 지원
2008년 10월 - 평양치과병원 준공식
2009년 2월 - 인천, 북측 축구 친선경기
2009년 7월 - 인천, 북측 유소년 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