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17 원종, 혈구사를 오르다


강화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니산을 떠올린다. 물론, 수천년 전부터 하늘에 제를 올리는 참성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에는 마니산만 있는 게 아니다. 진달래축제가 열리는 고려산, 왕릉이 모셔진 진강산, 천년고찰 전등사를 품고 있는 정족산 등 여러 명산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다.
 

   
▲ 혈구사 건물들이 세워졌던 석축.



강도시대(고려가 도읍을 강화로 천도했던 1232~1270년)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임금이 세운 '혈구사'는 혈구산(466m)에 자리한다. 혈구산은 고려 왕건이 나라를 처음 세울 때 혈구진이 있던 곳이다. 혈구진은 신라 원성왕 때부터 존재했으며, 조선시대 강화군 이름이 혈구군이기도 했다.

강화에서 혈구산은 마니산 다음으로 치는 명산이다. 강화의 중심에 솟아 있는 혈구산은 '구렁 혈(穴)'자에 '구렁 구(口)'자를 쓴다. 구렁이 크고 골이 깊다는 뜻이다. 고려산은 봉우리 두 개가 마주보는 반면, 혈구산은 높이 솟은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때문에 고려산은 여자, 혈구산은 남자로 각각 여겨지기도 한다.

혈구사가 있었던 터로 오르기 위해 혈구산 입구에 위치한 황련사에 차를 세운다. '큰법당'이라고 써 놓은 편액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름처럼 가장 큰 법당으로 보인다. 황련사의 일화 주지스님은 "대웅전과 같은 말입니다. 대웅전의 우리 말 표현이지요"라며 웃음 짓는다.
 

   
▲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돌절구.

일화스님은 황련사에 대해 "본래 혈구사에 머물던 대처승이 지은 절"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혈구산 7부능선 쯤에 위치한 혈구사는 62년 불에 타 사라진다. 이때문에 그 아래 쪽에 내려와 다시 집과 절을 지었는데 이마저도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아예 밑으로 내려와 지금의 황련사터에 다시 절을 지었던 스님은 67년 입적했다. 따라서 지금의 선원면 선행리 황련사는 말하자면, 혈구사의 후신인 셈이다. 황련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본래 국화저수지 부근 고려산 자락에 위치하던 사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누가 이 곳을 황련사라고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황련사 주지인 일화스님은 이 곳을 떠나 본래 혈구사터로 올라갈 생각이다.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강화 곳곳이 개발붐이 일어나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있는 이 근처 여기저기서 건물을 짓고 있는게 보이지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굴착기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고려사는 혈구사가 고려 고종 46년(1259)에 지어진 사찰이라고 적고 있다. 고종은 정족산 가궐을 세울 때 혈구사를 함께 세웠다. 혈구사에서 왕이 참여하는 법회가 열린 때는 원종5년인 1264년이다. 그 때를 상상하며 혈구산 정상으로 향한다.

혈구산을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원종은 가마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가마가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지고 산비탈이 험했으므로 중간중간 내려서 걸어올라가야 했다. 뻘뻘 땀을 흘리며 혈구사를 향하던 원종은 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고종에게 기도를 올렸다. 선친은 1259년 마니산 이궁지와 흥왕사, 그리고 혈구사를 지은 뒤 돌연 승하하셨다.

'아바마마 오랑캐의 요구가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몽고로부터 고려를 지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고종임금이 승하한 뒤에도 몽고는 고려에 끊임없이 개경으로의 환도를 요구해 왔다. 환도는 곧 몽고와의 화친을 의미했다. 그럴 경우 도읍까지 옮겨가면서 저항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이대로 버틸 경우 몽고의 속국이 되어 고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질 수도 있었다. 중국의 금나라와 송나라가 이미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원종은 생각했다. '고려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선 몽고와의 화의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최씨 무신정권이 환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으므로 환도를 위해선 내부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원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비애가 느껴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산을 오르는 왕 앞으로 뱀이 지나갔다. 신하들이 깜짝 놀라 뱀을 죽이려 막대기를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원종이 말했다.

"불쌍한 고려 민초의 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30분쯤 올랐을까. 왕이 드디어 혈구사터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이 합장하며 나와 왕을 맞아들였다.

신하들과 승려 수백 여명이 혈구산 중턱을 가득 메운 가운데 원종이 법회를 열었다.

"훔마니 반메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디 오랑캐로부터 고려를 지킬 수 있는 방책을 알려주시고 불쌍한 고려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소서."

왕은 부처님에게, 돌아가신 선친에게 끝없는 기도를 올린다. 왕의 뒤에 서서 함께 기도를 올리는 승려와 신하들의 눈에서 뜨거운 물결이 일렁인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