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병이 있어 궁궐을 나설 때 퍽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돌아서니 사모하는 마음이 풀려 가슴 막히는 증세도 다소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곳은 바로 수원의 경계이다. 말에서 내려 경들을 부른 것은 내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

 정조16년 왕이 능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지지대에 멈추어 심경을 토로한 말이다. 그래서 지지대라 이름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정조는 병적일 만큼 비명의 부왕을 그리워했다. 정사를 보다가도 부왕 생각이 간절하면 불시로 화성길 채비를 서둘렀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속담이 『모처럼의 능참봉에 한달 거둥이 스물아홉번』이다. 한달 스물아홉번이라면 매일이니 과장이기는 하나 임금의 잦은 능행차로 고달팠을 능참봉의 처지가 짐작될만 하다.

 그런가하면 정조는 귀경길 때마다 지지대에 쉬면서 시를 읊어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도 했다. 『晨昏不盡慕 此日又華城…』는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움 다할 길 없어/오늘 또다시 화성길에 오르네…』

 서울서 화산릉-그때는 능이 아닌 원이었다-까지의 거리는 우리의 리수로 140리가 된다. 그러나 90리로 공인했다. 당시의 궁중 법도로는 임금이 도성에서 100리 밖을 나갈 수 없어 그렇게 축지했기 때문이다. 능행차 코스는 원래 노들나루를 건너 과천으로 해서 지지대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부왕의 죽음에 관여된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 앞을 지나기 싫어 지금의 대방동과 안양을 거쳐 지지대를 넘었다.

 그때마다 임금은 고개를 오르면서 어찌 이다지도 더디냐며 성화였고 돌아갈 때에는 왜 이렇게 성급하냐며 서서히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지지대라고도 전해진다. 지금 지지대는 옛 고갯길이 아니다. 넓게 뚫린 경수국도가 되어 종일토록 차량들이 꼬리를 잇고 수원쪽으로 조금 내려서 고속도로가 걸치고 지금 입체교차로 공사로 어지럽다. 다만 옛길이 굽이굽이 돌아내리며 노송길의 공원가가 되어 있다.

 수원시가 이곳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