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예술인 41 인천부평전통연희단 예술감독 이 동 주
최정예단원 15명 선발 … '국내최고 연희단' 한발

21일 부평아트센터 첫 정식공연 밤낮없이 연습




인천 부평을 대표하는 예술장르하면 단연 풍물이다.

22개 동마다 풍물패를 갖고 있고, 민·관이 함께 일궈온 부평풍물대축제가 올해로 어언 14년차를 맞았다.
이제 이 지역 주민에게 풍물은 특별함이 아닌 생활 그 자체다. 이곳에서 또 한번 주목끌 만 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풍물을 넘어 가(歌)·무(舞)·악(樂)이 어우러진 전통연희의 진수를 보여주겠다고 선언, 전문 전통연희단을 창단하고 나섰다.

부평풍물축제위원회가 제안, 부평구가 적극적인 지원군으로 섰다. 창단 소식에 전국의 전통연희 젊은패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 중 15인이 최종 선발, '인천부평전통연희단'이 공식 깃발을 세웠다.

이들을 이끄는 예술감독으로 이동주씨(39)가 낙점됐다. 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 20여년동안 뼈가 굵은 그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연희단을 만들겠다고 의욕을 건네는 이 감독이다.


#. 최고 연희단을 향해

"전문 연희단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풍물에는 많이들 익숙하지만 전통연희 개념은 아직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소리와 춤과 음악에 이르는 장르가 어우러진 것이 연희지요. 국악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놓을 만한 전문 연희단이 아직 없는 실정입니다. 최고의 연희단을 만들 겁니다."

이 감독은 신명으로 각오를 말한다.

연희란 마당에서 펼치는 무대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전통의 여러 장르를 녹여 뭔가 특별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퓨전은 아니다. 기본은 철저히 전통에 근거한다.

연희자도 한가지에만 능해서는 안된다. 1인 3역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머릿속엔 구상이 가득하다. 이를 풀어내는 일만 남았다.

단원을 뽑는 일부터 국악계 주목을 받았다.

내로라하는 선생님들을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모셔왔다. 국악 관련학과 출신들이 대거 몰려왔다. 15명이 정식 단원으로 뽑혔다.

"소리를 하면서 춤을 추고 음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본기가 튼튼한 친구들입니다. 의욕이 대단합니다."

목표는 국내 최고다. 이는 곧 세계 최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 전통 연희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감동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똑같은 무대는 올리지 않으려고 해요. 무대 크기에 따라 다른 맞춤형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재미와 흥은 당연히 따라와야하는 것이지요."


#. 시민과 첫 만남

창단 후 몇몇을 모시고 2번의 시연무대를 가졌다.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았다. 시민들을 만나는 공식 첫 공연은 오는 21일 오후 8시 부평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다.

"단원들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연습하고 있습니다. 연습 없이는 어떤 예술단도 해낼 수 없는 무대를 보여드릴 겁니다."

공연 타이틀을 '인천 연희와 만나다'라고 붙였다. 극적인 요소를 더해 공연을 연다. 무대마다 여러 요소를 섞었다.

예컨대 '씻김'에서는 진도음악과 춤을 더했는 가 하면, 사물놀이 앉은반엔 경기도당굿의 음악을 보탰다.

모듬북과 설장구, 진도북춤, 경북 북대 합해 '진고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통의 기본 위에서 모든 것을 더하고 짜깁기 했습니다.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단체가 되고 싶습니다. 첫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과 한편으로는 설렘이 있습니다. 오셔서 보시고 평가를 내려주십시오."


#. 풍물은 내인생

이 감독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0년전이다. 결혼 후 살림집을 찾기 위해 도달한 곳이 인천이었다. 그 후 그의 손을 거쳐간 팀들이 소리오름, 가온누리, 부천여공고 풍물단에 이른다.

팀을 이끌면서 한편으로는 김덕수패 사물놀이 단원으로 전국을 누볐다. 스승 김덕수를 모신 지 어언 20년이다. 그 사이 새파란 청춘은 어느덧 중년이 됐다.

어려서부터 풍물굿을 따라 다니던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장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신나는 놀이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풍물을 배우기 시작한다. 다니던 금산농업고(현 금산상업고)는 당시 좌도농악으로 이름을 날리던 학교였다. 고교 졸업후 결심을 한다. '앞으로 10년후 이 분야에서 1인자가 되겠다.'
김덕수를 찾아갔다. 2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전수생으로 선발된다. 그 후 지금까지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역사를 쌓아왔다. 10년후 최고가 되겠단 꿈을 실현한 것이다.

"전문 연희단을 만드는 일은 오랫동안 가져왔던 소망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룬 셈입니다. 지금부터 목표는 최고로 거듭나는 일이지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해 낼 수 있다는 의지도 크다.

스스로는 예술감독 이전에 역시나 연주자다. "마지막에는 무대에서 죽고 싶습니다. 프로는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김경수기자 kk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