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임신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단 하루도 배태의 기쁨을 누려보지 못하고 뱃속의 아기를 지워야 된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서운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가진 아기인가 말이다. 세대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렇게 갖고 싶던 아기를 배태하게 된 것도 꿈만 같은데 죽은 세대주의 분신 같은 그 아기와 마음의 대화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채 지워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거나 마찬가지로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아기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의 아버지가 곽인구 하사든, 아니면 제3의 남자일지라도 그녀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뱃속에 든 아기는 죽은 세대주의 아기로 귀착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씨앗을 자기 뱃속에서 배태시켰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고민해 보거나 윤리적으로 죄악시 해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배불러서 아기 낳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기뻤고, 또 죽은 세대주의 뜻도 받들 수 있게 되어 저승에 있는 고 김영달 상사도 이 사실을 알면 자신처럼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 김영달 상사는 아기 생산이 불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결혼해서 2년 남짓 신혼생활을 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세대주가 오랜 기간 군대에서 특수무기를 다루는 초기하사관이라서 부부간의 성생활은 가능해도 생식능력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들 부부는 벌써부터 애육원에서 건강한 남자 아기를 입양해서 진실로 그들 부부가 낳은 자식처럼 키워보겠다고 죽은 세대주와 굳게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헌데 자신의 뱃속에 생명의 씨앗을 점지해준 곽인구 하사는 죽은 세대주보다 더 젊고 건강하고 미남인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다 집안은 또 얼마나 좋은가? 곽밥(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그런 남자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인데 그렇게 마음에 드는 남자의 씨앗을 받아 배태한 새생명을 어떻게 지운단 말인가?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 해도 이 아기는 낳아 세대주 못지 않은 훌륭한 전사로 키워 세대주가 목숨 바쳐 지킨 조국에다 바칠 거야.

 성복순은 속옷을 주워 입으며 야멸차게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훗날, 관리소 생활이라도 좀 익숙해지면 다시 의사에게 담화신청을 해서 죽은 세대주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와 자신의 생전 약속과 뱃속 아기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세세하게 고백하면서 아기의 중절만큼만은 봐 달라고 매달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뱃속의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길만 있다면 그 어떤 시련과 고통도 다 이겨내리라고 마음먹으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몸은 비록 로동교화소에 들어와 있지만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려자로서의 기쁨을 누려본 날은 없었습네다….』

 깔따(차트)에다 검진 결과를 적으며 건성으로 성복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