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한파가 몰아친 겨울 아침. 만석공원 을 찾았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길목이었던 곳이다. 정조대왕 이 화성능행차 때 융복을 벗고 황금갑옷을 갈아 입은 장소이기도 하다. 만석공원이란 이름은 만석거 (萬石渠)에서 유래한다. 농자천하지대본야라. 만석거는 정조가 농업혁명을 꿈꾸며 만든 저수지였다.
 
 
200년 전 저수지는 지금, 미술관과 도서관, 축구장까지 갖춘 제법 규모 있는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공원 초입에 선 아담한 건물은 수원미술전시관이다. 그 앞에 '만석거'라고 쓴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저수지 방향으로 몇 걸음 더 가자 '구 영화정지'란 비석이 보인다. '영화정'이 서 있었던 자리란 뜻이다. 영화정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구청의 '출장소' 정도 되는 작은 관청이었다. 관리들은 이 곳에서 먹고 자며 만석거를 관리했다. 옛 영화정 자리는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는 중이다. 이 곳에서 공원로를 따라 5분 정도 걷다보면 복원한 영화정을 만날 수 있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만석거 둔치를 따라 거닐고 있다. 그들의 무리가 되어 발걸음을 옮긴다. 공원로 중간 지점. 발걸음을 멈추고 만석거를 바라본다. 저수지는 광활하다. 만석거 수평선 위로 얹혀진 아파트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만석거의 의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갑문이라 할 수 있는 '수갑'이 설치된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만석거는 정조대 '혁신도시'이자 '친위도시' 상징이다.

농업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화성 축성이 한창이던 1795년 고민에 잠긴다. 수원땅은 소금기가 많아 쌀농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3년 간에 걸친 퇴비증산 노력 끝에 토양을 바꿨지만 가뭄을 견뎌낼 만큼 기름질 수는 없었다.

그 해 3월1일, 만석거에서 첫 삽이 떠 진다. 이후 두 달여 만인 5월18일 깊이 3m, 둘레 1천226m의 드넓은 저수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콸콸콸, 광교산 파장동 일대로 흐르던 진목천 개울물이 저수지를 가득 채웠다. 아니나다를까. 만석거가 만들어진 뒤 시작된 가을, 전국적으로 흉년이 찾아든다. 그러나 만석거로 농사를 지은 화성은 대풍을 맞는다.

만석거의 축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수리기술은 단순한 '보'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만석거에 물조절이 가능한 '수갑'을 설치함으로써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다. 아울러 토지 없이 떠도는 백성 1만 명을 불러들이는 '고용창출' 효과도 볼 수 있었다. 이는 국가가 직접 나서 가난한 백성의 삶을 책임진다는 의미였다. 여기에다 혈기방장한 장용영 군사들에게까지 월급을 주고 공사에 참여시킴으로써 튼실하고 신속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정조는 만석거 옆에 '대유둔'이란 국영농장도 만들었다. 지금의 '연꽃마을' 아파트 자리가 그 곳이었다. 땅이 없는 백성들은 대유둔을 임대, 여기서 거둔 결실의 30%만 세금으로 내고 70%를 가져가 가족들을 배불리 먹였다.

정조는 대유둔을 관리할 둔도감은 양반으로 뽑았지만 마름과 사령, 권농은 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누구라도 능력 있는 사람을 임명했다. 신분에 관계 없이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물을 선출한 것이다. 이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준 조치였다.

만석거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대략 2만 냥 정도. 왕은 따로 세금을 걷거나 기부를 받지 않고 혜경궁 홍씨 진찬연을 위해 준비한 비용 10만 냥 가운데 남은 돈을 만석거 공사비로 충당했다. 1만 냥은 토지매입과 개간에, 1만 냥은 저수지 축조에 각각 사용됐다. 1797년(정조21)과 1798년 찾아온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만석거의 효과였다.'농업과학의 혁명' 만석거는 지금도 여전히 출렁이고 있다. 땅을 기름지게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겠다는 정조의 마음처럼.

/글·사진=김진국기자 (블로그)freebird


대유평과 대유평 농악 - 군사들 직접 풍물패 조직 신명나고 힘찬 농악 펼쳐

정조시대 선진적 농업기반으로 조성된 만석거 주변에 만들어진 국영 농장의 이름이 바로 대유평(大有坪)이다.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크고 너른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 대유평은 국가의 둔전(屯田)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대유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수원의 옛 백성들은 대유둔이라는 이름보다 대유평을 선호했다. 이 대유평에서 농사짓는 이들은 단순히 농민만이 아니다. 농민과 더불어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함께 농사를 지었다. 정조는 가장 이상적인 군사체제가 바로 병농일치(兵農一治)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평상시에 부유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농사를 짓고, 시간이 날 때마다 군사훈련을 하여 농민이 곧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군사체제였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체제가 사라지고 말았다.

정조는 가장 이상적인 군사체제와 농법을 새롭게 계승하기 위해 앞서와 같은 체제를 만석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터전인 대유평에서 진행시켰다. 이러한 결과 토지없는 백성들이 다수 대유평 일대로 모이면서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 군사들도 함께 지키게 된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농악(農樂)이었다. 우리 백성들은 예로부터 신명을 가지고 살아왔던 민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사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에 음악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다. 대유평에서 모내기를 할 때나 김매기를 할 때 일반 농민들과 군인들이 두레를 조직하여 풍물을 울리고 신명난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바로 대유평 농악이다. 그런데 대유평 농악은 일반 농악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유평 농악은 군사들이 직접 풍물패를 조직하여 음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악기 연주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힘찬 음악이었다. 그래서 대유평 농악이 아닌 대유평 군악(軍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대유평 농악이 80년대 대유평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농토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렀다. 다행히 어린시절부터 대유평 농악과 함께 하던 이들이 새롭게 대유평 농악을 부활시키고 있다. 아마도 몇 년 후면 그 힘찬 농악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