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이야기
영국 런던에서 옥스퍼드를 거쳐 월요일, 집에 도착하니 두툼한 책이 한권 와 있었다. 목하 영화 평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동진 전 조선일보 기자의 인터뷰집이었다. 홍상수, 봉준호, 류승완, 유하, 임순례, 김태용에 이르는, 영화감독 6인과의 대화를 모은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예담). 런던에 있을 때, 책을 보낼 주소를 찍어 달라는 휴대폰 문자를 받았는데 바로 그 책이었다.
'부메랑 인터뷰'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바는 없었다. 모 인터넷 포털에 연재를 하더니, 그 첫 번째 결실이 책으로 묶여졌구나 싶었다.
눈길을 끈 건, 연재에선 현실화되기 불가능했을 그 분량이었다. 프롤로그를 위시해 750쪽에 달하는 게 아닌가. 간간이 곁들여진 리뷰와 사진을 포함하면, 한 감독 당 120쪽쯤 할당된 셈이다.
목차를 들여다보니 길게는 150여 쪽(홍상수), 짧게는 60여 쪽(김태용)이다.
책은 인터뷰 모음집을 넘어 감독론이라 할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씨는 프롤로그(8쪽)에서 말한다. "이 글들을 단지 인터뷰 기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길고 긴 대화를 통해 구성한 감독론이며, 오늘의 한국영화에 대한 연애편지(라고 믿는)다."라고.
요점은 "길고 긴 대화"다. 이동진 그만의 감독론이자 연애편지를 빚어내기 위해 바친 노고! "지난 2년간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을 위해 그는 "감독들의 영화 속 대사들에서 질문을 끌어내"었다. 이번에 실리진 않았으나 100편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고는 DVD나 비디오를 통해 해당 감독의 장편 영화 전작을 "순서대로 전부 다", 그것도 "한 장면씩 최대한 꼼꼼히 보"면서 준비했다. 때로는 "…대사의 상당량을 맹렬히 받아 적었다. 한 편을 보는데 최소한 대여섯 시간씩 걸렸다. 작품 수가 많은 감독들은 전작으로 보는 데만도 꼬박 2~3주가 걸리기도 했다."
사전 준비가 이 정도였다면 인터뷰나 인터뷰 그 이후, 그리고 책을 내기 위해 바쳤을 땀과 피의 양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터. 이런 '고행'을 거친 뒤 "평균 80매였던 애초 원고는 무려 3배에서 7배까지 늘어났다. 한 감독에 대한 원고 분량이 500매가 넘는 경우들도 속속 이어졌다…." 이씨 특유의 "치료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약한 의미에서의 정신병"(738쪽)이 아니라면 탄생하기 힘들었을 책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고백컨대 내게 이 책은 일종의 '저주'다. 몇 해 전부터 김지운, 송일곤, 전수일, 전도연, 송강호 등 몇몇 국내 영화인들에 대해 원고 100매에서 200매에 달하는,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인터뷰나 인물론을 작성해왔다. 언젠가는 책으로 묶어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설사 출간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저주 속에는 일말의 자극의 계기가 내포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료 평론가로서 또 다른 치열한 고민을 하게끔 독려한다고 할까. 이 자리를 빌려 이씨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축하를 보내고 싶다. 벌써 그의 두 번째 감독론이 기다려진다.
/영화 평론가·경기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