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개화기 기독교가 끼친 공로는 크다. 선교사들을 통해 의료와 교육사업에 기여한 업적을 결코 과소평가 할 수가 없다. 1880년대 입국하기 시작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①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고 ②학교를 열어 교육을 통해 간접적 선교를 하며 ③병원을 지어 기독교정신인 박애에 의한 의료선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이 건립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날 영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영화학당이다.

 영화학당은 1892년 개교했다. 우리나라의 초등교육 기관으로는 최초였다. 『내리의 아버지』라는 존스(한국명 조원시) 선교사 내외에 의해서였다. 자기 집에서 한명의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서 였다. 다른 기록으로는 남자 세 명 여자 두 명이었다고도 한다. 영화라는 이름은 『길이(永) 그리스도화(化)』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학생들이 불어나자 내리예배당의 뒷방을 빌어 옮기고 다시 남녀의 학교로 분리 여학교는 존스 부인이 맡았다.

 그후 미국 본토로 부터 희사해준 기부금으로 싸리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사했다. 1903년 가을이었다. 그 위치는 지금 S가구점이 있는 옛 원흥상회 자리로 오늘과 같은 빌딩이 건축되기 전만해도 언저리에서 그때의 기초석들이 눈에 띄었었다. 지금의 창영동으로 이전한것은 국치의 해인 1910년-그해 영화여학당을 영화여학교로 개명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의 여성지도자 다수가 배출되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가 영화 출신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동안 초등교육기관이던 영화가 1954년에는 중학과정 66년에는 고등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중등교육의 오랜 꿈도 실현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 경작지와 함께 하는 옹색한 모습이었었다.

 흔히 연륜이 오래면 침체에 빠지기 쉽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기우요 오랜 역사속에서 경륜은 쌓이는 법-그 경륜이 현재와 미래를 약동케 하는 밑받침이 된다. 그런데 새로운 발전을 위한 영화의 옛 교사 철거를 놓고 찬반의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