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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우리는 역사가 남긴 크나 큰 유산을 잃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숭례문도 그랬고 보신각도 그랬다. 유적과 유물 앞에 서면 늘 엄숙하고 숙연해 지는 것은, 그 존재 하나만으로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쌓여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무형의 재산을 떠나 그것은 역사와 소통되고 싶어하고 소통되는 삶 속에서 손 때 묻은 역사 속의 삶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21년(1794), 김포에 있는 인헌왕후의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 안산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면서 능행 중 머물며 활을 쏘고 손을 씻었다는 유적지(인천 문화재1호, 2호, 3호)인 욕은지와 도호부 청사, 어사대가 인천 계양구 계산동 948 번지 인천부평초등학교 내에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밝고 맑은 심성으로 자라야 할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어른 키보다 더 높은 철재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고 내아는 자물쇠가 굳게 잠긴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철재 울타리는 전혀 없었다. 청사 바로 옆 수양버들과 수령 6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암수가 있어 옛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빼어난 경관에 안식함까지 더 해 줬던 삶 속에서의 문화유적은 학생들에게나 지역 주민들에게나 굳게 잠가버린 자물쇠와 철조망 하나로 그들의 가슴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교 100년의 역사를 넘어 근대사와 함께 걸어온 학교 입장에서 본다면 학교 내에 이 같은 문화유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외부 건물 옥상에 올라 보면 심각성은 더하다. 청사 기왓장 위로 흙먼지가 쌓이고, 간혹 바람에 날린 오물들까지 올라가 있기도 한다. 철재 담장 안쪽으론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풀 한 포기 제 때 베어 내는 일도 없다.

어린 학생들의 교육적 측면에서나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을 위해서나 채워진 문을 개방하여 관리됨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어린이들의 심성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경관이나 벽, 채워진 자물쇠를 열어 놓지 않고서야 미래의 주축이 될 어린 가슴들이 열리는 시간은 그만큼 길어지게 될 것이며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방치시키는 일은 끝없이 호흡하며 교감을 나누어야 할 옛 것들과의 단절됨이 못내 씁쓸함으로 남는다.

/권영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