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성향 감추고 중앙무대로
'부패 척결' 앞세워 중국 1인자로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하는 4세대 지도부가 전격 등장했을 때 중국 인민들의 눈에 비친 말쑥한 양복 차림의 젊은 후진타오의 모습은 이전 혁명 세대로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3세대 지도부 장쩌민(江澤民)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집권 초기 장쩌민의 후광에 가려 직접적인 실력 행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후진타오식 정치 개혁과 신농촌 건설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착실히 실행하며 그 만의 독주 체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 후진타오 그는 누구인가?
정치 소나기 피했던 후진타오
후진타오는 안휘성(安徽省) 출신으로 칭화대학 입학 후 보도원이라는 당과 관련한 교육을 하는 일종의 학생 지도원 직책을 맡는다. 하지만 정치 보도원 생활은 문화 대혁명이라는 광란 속에서 '지배층의 졸개'라는 비난의 근거가 되고 이후 그는 최대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중립성을 유지한다.
후진타오는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한 관료 생활에서도 역시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며 중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는데 이러한 후진타오식' 無'정치성은 천안문사태를 비롯한 중앙의 여러 정치적 사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柔와 强을 지닌 후진타오
후진타오는 씨장(西藏: 티베트)지역에서의 관료 생활을 통해 중앙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89년 3월15일 씨장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소요 사태는 군에 의한 무력 사용으로 진압됐는데 진압 과정에서 후진타오는 씨장 당서기로서 철모를 쓰고 작전을 지휘하며 중앙에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후 1992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정치국 상무위원, 2003년 국가 주석 등 가파른 정치적 성공 가도를 달린 후진타오의 성공에는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성향과 때로는 과감하면서도 실용주의적인 그 만의 수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수완은 3세대 지도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집권 초기 3.5세대라는 평을 들으며 장쩌민으로부터 완전한 권력을 회수 받지 못한 후진타오는 부패 척결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오며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방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고 결국 현재의 완전한 후진타오식 중국을 만들게 된다.
그동안 후진타오는 부패 척결, 신농촌 건설, 서부 대개발 사업 등 사회·정치 사업은 물론 사스(SARS)등과 같은 국제적 문제에 있어서 유연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국내·외에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농촌, 부패 문제에서부터 최근 불거져 나온 멜라민 파동까지 과거 개혁·개방의 유산은 아직도 후진타오를 억누르고 있다. 이제 절반의 레이스를 달려온 후진타오. 남은 임기 동안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글=박정동 소장·박재정 연구원